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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곧은 길 굽은 길

2000-09-06
협상학의 기본전제가 되는 '주고 받기'에 관한 실험조사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있다. 일정기간 동안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된 'give and take'의 빈도를 측정한 것이다. 그 결과 give가 2,184번이었던 반면 take는 무려 7,000번이었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실험결과에 비춰보면 남북정상회담 이후 줄을 잇는 양측의 각종 협상에서 남측이 지나치게 주기만 하고 받는 것은 없다는 비판이 적지 않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주고 받더라도 속으론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인 게 사람들의 심리이기 때문이다.지난 주말의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전국민의 73%가 남북관계는 남한의 일방적인 양보에 기초하고 있다고 여긴다. 남측이 장소, 일정, 회담대표, 의제를 비롯한 협상 구성요소의 상당부분을 북측의 뜻에 따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 이후 일방적인 양보에 대한 비판론은 한층 거세진 듯하다. 특히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송환과 관련해 상호주의는 아니더라도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정부측에서도 모종의 방책을 세우고 있음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내비쳤다. 우리 정부측에서는 이들을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에 포함시켜 해결하는 방안과 또다른 방법을 검토중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또다른 방법은 탈북형식으로 이들을 북에서 추방하고 남측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우회전략의 하나다. 정공법이 아닌 비공개, 비공식적인 해법인 셈이다. 물론 체면과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는 북한측의 입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 보수계층에서는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편법이라고 질타한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특유의 '광폭정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북측은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은 있어도 강제 납북자와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북한체제의 특성상 앞으로도 공개적으로는 이런 입장을 바꾸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들어 설명하는 북한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남측의 가족을 위해서도 가장 현실적 방안을 찾는 것에 대해 비난 일변도로 나갈 필요는 없다.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남긴다는 이유를 들어 납득하지 못하는 국민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비극의 연장보다는 낫다. 비극의 연장은 또다른 비극이다.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도 노예해방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비난의 소지가 있는 편법을 썼다. 노예해방을 명시한 수정헌법 13조 표결 당시 가결정족수인 상.하 양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기 위해 2명의 의원을 매수했다. 그는 당시 공화당 의원 2명에게 특명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개헌에 의한 노예제 혁파는 지금 발이 묶여 있는 수백만명의 노예와 앞으로 태어날 또다른 수백만명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사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2표를 얻어내야 합니다". 결국 2표는 매수되어 노예제는 영구히 철폐되었다. 그는 정당한 목적이 매수라는 부정적인 수단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존경받는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여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나치 당국에 뇌물을 준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됐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영국에 있던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빈에 살고 있던 여동생 2명이 나치 '종족법'에 따라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독일로 달려가 나치 당국과 협상끝에 뇌물을 주고 두 동생을 구한 것이다. 학자들은 학대행위를 막기 위해 그 당시에 통용되는 유효한 수단을 동원한 행위를 부당하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변호한다.

앞서 살다간 일부 성현들도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니고 굽은 길이 도리어 곧은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설파하곤 했다. 일시적인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고통받는 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귀환시키는 것이 낫다.

서독과 동독의 경우에도 정치범 석방을 위해 돈으로 비정상적인 거래를 한 전례가 있다. 원칙을 지키지 않고 우회했다고 손가락질만 받을 일은 아니다. 당장은 양보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정들이 쌓여갈 때 남북관계에서도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프리드리히 헤겔의 명제가 유용하다.

김학순/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