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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협상학 F학점 국가'

2000-10-11
너무나 역설적이지만 주고 받는 것이 원칙인 협상에서 양보는 최대의 적이자 금기사항이다. 협상 전문가들은 당신의 교과서에서 '선의의 양보'란 항목을 아예 빼어버리라고 극언할 정도다. 선의의 양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이유를 댄다. 첫째, 내가 몇가지 먼저 양보함으로써 상대방을 부드럽게 만든다. 둘째, 협상은 진전되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양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선의의 양보는 상대방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경하게 만든다. 최초의 요구를 너무 적게 하고 양보를 지나치게 빨리 하면 외려 합의도달 가능성이 적어지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는 사실은 협상학의 상식이다. 이는 상대방이 상응하는 양보를 하기는커녕 더 많은 양보를 기대하는 추적현상 때문이다. 양보가 나쁜 또다른 이유는 선례를 만드는 탓이다. 그래서 협상학에서는 성 프란체스코가 되기보다는 구두쇠 스크루지가 되라고 주저없이 단언한다.협상의 제1 계명은 상대방의 첫 제안은 절대로 수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능한 협상가일수록 협상이 깨질까봐 두려워한다.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보가 협상의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전략전술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최근 들어 대우자동차.한보철강 매각, 남북회담 등의 협상대표들과 정부가 국민적 동네북이 되고 있는 것은 협상수칙 1조부터 지키지 않은 아마추어인 탓이다. 협상력과 복잡한 전략전술은 그 다음의 문제다. 이런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순진무구하다'는 말밖에 더 할수 없다는 게 협상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지난 6월초 방한했던 하버드대의 저명한 협상학자 데이비스 스미스 교수는 지난해 한.일 어업협상에서 쌍끌이 어로문제를 누락시킨 우를 범한 것을 통탄하면서 이렇게 촌평했다. "한국 공무원들이 6개월만 교육을 받았다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정부 고문으로 있는 한 동남아국가에 한국기업이 합작투자할 때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판단, 협상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우리의 협상능력이 비판의 도마위에 오른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자칫 국제사회에서 협상무능력 국가로 낙인 찍혀 국제적인 봉(鳳)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협상에 관한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사회주의국가 대부분이 협상의 명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북한은 이미 미국이 혀를 내두르는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돼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6.25 전쟁 휴전협상 당시 첫 유엔측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의 회고록을 보면 북한은 소홀히 해도 괜찮을 부분까지 꼼꼼히 챙긴다. 이 회고록은 미국의 협상학 교재에 사례연구로 등장할 정도다. 실제로 전문가들이 곳곳에 포진한 북한은 강대국들과의 협상은 더할 나위 없고 남북대화에서도 거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세계에서 맨처음 독립학문으로 연구하는 하버드대가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협상학을 중시한다. 이웃 일본만 해도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협상학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미 93년부터 경력직 외교관 채용에 협상시험을 도입했다. 심지어 경력 10개월짜리 신참 외교관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훈련에도 협상을 정식과목으로 채택했다.

우리 나라도 지난 95년 협상학회가 만들어진 이후 학문적 관심이 일기 시작했으나 정부차원이나 사회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현장을 보면 알고도 남는다. 협상력 강화는 더욱 거세질 세계화시대의 국제통상협상은 물론 남북통일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들과 수없이 많은 막전.막후 협상을 불가피하게 진행해야 할 우리가 풀지 않으면 안될 숙제다.

협상학자들은 선천적인 소질이 없더라도 협상의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면 누구나 훌륭한 협상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제통상협상학과정을 개설한 국제대학원도 생겨날 정도이지만 우리 정부관계자들은 비밀스런 일이 많아선지 그나마 민간 전문가들의 활용을 기피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신문 프로필에 '협상의 명수'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한국의 고위관료가 단 몇 명이라도 탄생하는 날은 언제쯤 일까.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