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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권력경영 제47법칙

2001-01-10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아무래도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로버트 그린.주스트 엘퍼스 공저) 가운데 47번째 법칙을 위반했을 개연성이 크다. 서문에서부터 '권력은 기본적으로 도덕과 관계가 없는 게임'이라고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는 저자들의 47번째 법칙은 '목표를 달성하면 멈출줄 알아야 한다'고 강한 경고음을 발한다.이총재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권력게임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계속되는 정부.여당의 악수(惡手)에 몰아붙이기만 하다가 기상천외한 역공을 당한 형국이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이 자민련에 '국회의원 꿔주기'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발한 잔꾀를 동원하고 DJP공조를 복원하게 된 것을 한나라당의 밀어붙이기에서 빌미를 찾고 있다. 거대 야당의 집요한 정치공세가 개혁정책을 좌초시키고 결과적으로 경제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게 양자(養子)로 가게 된 의원들과 김대통령의 강변이다. 거기다가 여권은 '안기부 예산의 선거자금전용수사'라는 카드를 들이밀어 국정의 초점을 경제위기 극복이 아닌 여야의 진흙탕싸움으로 변질시키기에 이르렀다. 검찰이 안기부의 15대 총선자금지원 수사를 벌이는 일도 DJP공조복원카드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법하다. 이같은 권력게임은 철저하게 '현실주의'라는 정치이론에 바탕을 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은 뒷전에 두고 권력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권력경영의 47번째 법칙을 미처 깨닫지 못한 자성의 목소리들이 뒤늦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강력하게 저지한 것이 결과적으로 DJP공조복원의 근거를 제공했다. 게다가 지난 연말의 새해 예산안 통과과정에 이르기까지 여당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면서 승전가(勝戰歌)를 부른 것이 또 하나의 부담이 된 셈이다.

지난해 6월5일 국회의장 선거때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주는 대신 자민련으로부터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약속을 받아내자는 현실론이 있었으나 이총재가 채택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그 뒤 국회법 개정문제가 한창 논란의 대상이 됐을 때 당내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주는 게 총선 민의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원칙론에 밀려나고 말았다. 물론 당시에 이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간의 밀약설이 흘러나오는 악재가 겹쳤던 게 불운일 수는 있다. 법대생들도 반대심문의 요령을 공부할 때는 "이겼다고 생각되는 순간 멈추어라"는 교수들의 법언(法諺)을 어김없이 새겨 듣는다. 프랜시스 웰먼 같은 법학자는 반대심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만두기 좋은 시점을 찾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변호사들이 증인을 궁지로 몰아넣는 쾌감에 몰두하고 있다가 심문이 지루해지고 말면 배심원들로부터 따놓은 점수마저 반감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법대에다 대법관 출신인 이총재가 '일단멈춤'의 중요한 시점을 놓쳤단 말인가. 정치지도자로 변신한 이총재의 약점 가운데 하나가 이상과 원칙, 모양새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이번 경우에도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권력을 경영하는 법칙'의 마지막 장인 48번째는 '모양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의 박자와 강약을 조절하는 지혜를 주문하는 마지막 법칙도 새삼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온갖 산전수전을 겪어보지 않은 게 없어 수읽기로만 따지면 누구보다 무궁무진한 정치9단 2명과 벌이는 권력게임에서 이번에는 이총재가 일단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년 가까이 남은 장기전에서 누가 승자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DJP라고 47번째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장 문제는 한나라당의 권력법칙 위반 여부가 핵심이 아니다. 진정한 승부는 권력에만 집착하는 현실주의 일변도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마음을 읽는 '감동의 정치'를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는 '깨어있는 시대'가 됐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