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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혁명을 떠올리는 세태

2000-11-22
엊그제 경향닷컴에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은 과격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하다. '요즘은 혁명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제목 아래 쓴 이 글은 서민들의 마음을 가감없이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온라인의 글들이 익명성 때문에 무뢰에다 무례까지 서슴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아 때로는 오프라인에 옮겨 놓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이 글은 요즘 세태를 축약한 것 같아 논란의 여지를 감수하며 네티즌 용어까지 그대로 일부 인용해 봤다."우리 사회가 넘 엉망이다. 배부른 것들은 계속 배부르고… 아니 더 이상 가난해 질 수도 없으니. 의료계의 밥그릇 싸움에 아파도 치료도 못받았고, 정치판의 눈꼴스러운 개싸움에 나라는 엉망이고… 외국넘들 돈 빌려다가 지들 배××나 채우고, 그리고 부실해지면 돈없는 국민 허리띠나 졸라매게 하고.(중략) 그런 자들은 같이 어우러져 살아가야할 이 사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쳐 먹지 못하고 버티면 강제로라도 몰아내야 한다.(중략) 아마두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날 것같다(하략)"
혁명을 결행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까지 떠올려 본다는 자체가 범상하지 않은 민심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답답한 마음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마냥 아슬아슬하다. 이같은 위기상황이 어제 오늘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정부와 집권당의 신뢰성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며 발길에 차일 정도가 된 것이 근본 원인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정부정책집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중추기관들까지 하는 일마다 국민들이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부터 국민과의 약속을 자주 어겨 적잖은 감점을 당하고 있다. 검찰수뇌부 탄핵안 국회상정을 저지한 것을 비롯한 집권당의 행태는 신뢰가 함몰된 정치의 표징으로 규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집권층은 언행일치는커녕 말을 바꾸고도 너무나 태연자약한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읽힌다.

결정적으로 믿음을 잃은 것은 비단 정치쪽에 그치지 않는다. 신뢰의 상징이었던 금융기관의 임직원들이 고객 돈을 횡령해 도주하는 일이 지난해 이후 무려 300여건에 이를 만큼 유례가 드물다. 이들의 감독관이자 신뢰가 존재이유인 금융감독원까지 '브레이크 없는 벤츠' 꼴이 됐으니 국민이 믿을 곳이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라의 백년대계를 맡은 대학입시당국의 말도 반나절이 못 가 믿을 수 없는 거짓말로 들통나는 판이다. 신뢰는 몇 가지의 실수로만 금이 가지 않는 법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사상 최대의 사정(司正)을 외쳐댄들 국민들이 감동을 받을 리 없다. 탄핵대상으로 떠오를 정도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정의 칼날을 휘두른다면 수긍할 사람이 있을지 두렵다. 이른바 4대 개혁만해도 그렇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이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신뢰의 중요성은 가장 오래된 정치학 교과서 가운데 하나인 논어가 잘 가르쳐 준다.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孔子)가 이렇게 말했다. "식량을 풍족히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고 백성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느니라". 자공은 "부득이해 3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군비를 버릴 것이니라".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부득이해서 2가지 중에서 또하나를 버린다면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식량을 버릴 것이니라". 자공은 의아해 했다. "예? 식량이라니요? 식량을 버리면 백성이 굶어 죽지 않겠습니까". 공자의 결론은 단호하다. "예로부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하지 못하느니라".

우리 정치현실에 이보다 더 명쾌한 해답은 없지 않을까 싶다. 단기간에 전시효과를 노리는 강수보다 하나씩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조치가 무엇보다 급선무다. 여기에는 자기 살부터 깎는 아픔이 곁들여져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번에도 문제는 수많은 다짐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실천이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