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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 희망박물관을 짓자

2002-01-16
카이사르, 네로, 루이14세, 나폴레옹, 카스트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권력자들의 이상형이 된 마케도니아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 그는 왕위 계승자도 남겨놓지 않은 채 권좌를 섭정자에게 물려주고 20살때 동방정복 원정길에 오른다. 떠나기 전에 재산도 몽땅 친지들에게 나눠주어 버린다. 그러자 측근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가시렵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대답은 가위 영웅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걸작이었다. "난 '희망'을 가지고 간다네"'희망'을 얘기하자면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상자를 빼놓을 수 없다. 잘 알려진 대로 제우스가 보낸 이 상자에는 노화, 질병, 악덕, 슬픔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고통이 담겨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판도라와 에피메테우스가 상자를 열어 보는 바람에 그 속에 있던 온갖 고통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상자 속에 '희망'만은 오롯이 남아 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이지만 최후의 보루는 역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일화다.

새해 들어서도 우리 사회에는 지난해의 연장선상에서 희망을 구가하기보다 절망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끝모르게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은 물론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해 소시민들은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파랑새를 포기할 순 없다.

경향신문이 2002년의 주제를 '희망을 만듭시다'로 정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희망의 불꽃을 키워가는 방책의 하나로 작은 제안을 내놓고 싶다. 이름하여 '희망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희망박물관은 이를테면 '작은 영웅들의 전당'인 셈이다. 뜻에 걸맞은 작명은 중지(衆智)를 모아서 해도 늦지 않다. 거창한 무용담보다 우리에게 희망의 싹을 가꿔갈 수 있게 만든 보통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한 곳에 모아 기리자는 취지에서 문득 떠올려본 단상(斷想)이다. 언론의 1회성 보도로 끝낼 게 아니라 비록 작은 상징물들이지만 희망박물관에 한데 모아 영구히 전시하거나 자료로 남김으로써 후대에까지 널리 전승하자는 뜻이 담겼다. 작지만 뭉클한 선행은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다.

우리에겐 독립운동, 참전,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같은 거국적이고 거시적으로 추념할 만한 일도 많지만 드러나지 않는 미담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과업도 결코 적지 않다. 불을 끄다 청춘을 사회에 바친 소방관들의 거룩한 사연, 일본 전철역에서 몸을 던져 시민을 구하고 숨져간 대학생 이수현씨 같은 희생정신의 주인공들, 목숨을 바쳐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낸 수많은 의인들, 평생 아껴 모은 전재산을 주저없이 사회에 환원한 독지가 할머니들의 갸륵한 봉사정신, 강도를 잡아주다 흉기에 찔려 다치거나 숨진 이들의 의협심에 이르기까지 숱한 미담들은 한때의 일로만 치부하기엔 귀중하기 그지없다. 작은 영웅들의 애틋하면서도 고결한 마음은 입으로만 애국과 공동체 사랑을 들먹이는 언필칭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그것보다 몇배나 값지다는 걸 날이 갈수록 절감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희망박물관에 전시하거나 보관할 '작은 영웅담'은 우선 근세 이후 언론매체에 보도된 자료를 토대로 삼으면 손쉬울 것이다.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거나 발굴된 것도 대상에 포함되면 좋을 게다. 시공(時空)을 뛰어넘으려면 사료(史料)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추가로 찾아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희망박물관이 박물관과 도서관 기능을 겸하는 형태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작은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품이나 조각작품을 만들어 곁들이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 계획은 전문가들과 각계 인사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은 뒤 차근차근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희망박물관이 세워진다면 무엇보다 탁월하고 생생한 교육장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일반시민들이 관람하거나 연구자료로 쓸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재원이 문제라면 독지가들을 찾아볼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정부 차원에서도 검토해봄직하다. 민간차원에서 추진한다면 모금운동을 펼쳐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작은 정성이 모이면 뜻은 훨씬 클 것이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