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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 고도의 지성과 村婦의 상식

2001-11-14
국악인들은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주저 없이 부른다. 거문고가 모든 국악의 으뜸이라는 것이다. 남성적 악기의 대표주자인 거문고는 그런 만큼 '천하의 고집불통'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야금이 오늘에 이르면서 다양한 개량이 가능했던 반면 거문고는 더 이상 개량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김대중 대통령을 우리나라 악기에 비유하면 거문고에 해당한다고 이색적인 주장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다. 김대통령은 우리 역사상 최고 수준의 지성을 갖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이는 나라 안팎에서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통령은 오기와 고집도 알아줘야 할 정도라는 세간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정치행태나 정책, 인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 판단과 의지가 세워지면 꺾이지 않았다. 여론의 바로미터 가운데 하나인 언론이 뭐라하든 끄떡하지 않을 만큼 강경할 때도 적지 않았다. 김대통령의 오기는 긍정적인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은 탓에 끝내 집권당 총재직 사퇴라는 초강수(超强手)를 둘 수밖에 없는 난국을 자초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무엇보다 사람을 쓰는 문제에 이르면 더욱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김대통령의 의중은 흔히 지적되는 권력누수방지와 정권재창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힘들었다. 시정(市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도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의 판단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대통령의 오기와 고집은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일정 부분 인정한다. 그의 자문역 중의 한 사람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황태연 교수는 이를 김대통령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체질에서 찾고 있다. 소음인인 김대통령은 단순하고 누구나 아는 뜻을 세우되 끝까지 견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북 문제와 개혁에 관한한 끈질긴 인내심과 집념을 갖고 비판세력에 맞서고 있다는 진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실 김대통령은 자신의 높은 지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웬만한 참모들이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는 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고도(高度)의 지성이 때로는 촌부의 상식보다 못하다.

작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공자(孔子)가 어느날 아홉 구비가 구부러진 구멍이 있는 진기한 구슬을 얻었다. 공자는 그 구슬에 실을 꿰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아낙네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아 근처에서 뽕을 따고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密爾思之 思之密爾). 공자는 한참 생각 끝에 그 뜻을 깨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개미 허리에 실을 맸다.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 넣고 다른 쪽 출구에 꿀(蜜)을 발라서 유인했다. 마침내 허리에 실을 맨 개미가 출구로 나왔다. 실에 꿰어진 것이다. 공자는 아낙네가 일러준 밀(密)에서 꿀(蜜)을 떠올렸던 것이다. 공자천주(孔子穿珠)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하게 된 일화다.

스스로의 지성을 과신하는 바람에 달갑지 않은 평판을 들어야하는 김대통령이 뒤늦게나마 인사스타일에서부터 국정 전반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참모진의 입에서 '인사탕평'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그런 조짐이다. 최근 군과 경찰간부 인사에서 그 싹이 보였다. 어제 있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인사에서도 탈정치색깔을 선보였다. 하지만 특정지역 인사라는 논란은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해 아직은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는 유보적 시각도 잔존하고 있다. 뒤틀린 것은 이른 시일 안에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후속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 국정쇄신 약속불이행의 상처는 치유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천과 일관성이다. 김대통령의 뿌리깊은 부정적 이미지는 말이 언제나 앞선다는 점이었다. 그의 변신에는 정치권 특유의 음모설까지 상존한다. '정치적 지혜는 실질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존 애덤스의 법칙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된다면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