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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 '얼굴없는 전쟁'의 회색진실

2001-10-10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곳이 판문점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폐부를 찌르던 대사 가운데 하나다. 총을 겨눈 적이면서도 휴전선을 넘나들며 동족의 정을 나누다 돌발사태로 인해 사상자를 내고 마는 총격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던 중립국감독위원회 장교가 한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진실조차 감출 수 있다는 메시지가 역설적으로 들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평화가 아닌 전쟁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경구(警句)는 상징성과 더불어 또다른 아이러니를 안겨준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으레 패전국가나 그 국민, 무고하게 희생되는 양민일 수밖에 없다는 게 상식이고, 상처뿐인 영광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도 사실상 패자나 다름없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어떤 전쟁이든 소문은 무성하고 억측이 춤을 추곤 한다. 전쟁 당사자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는 흘리고 불리한 것은 감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역정보와 심리전, 선전술까지 동원돼 진실을 캐내기란 지난(至難)해진다. 자연 실체적 진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워싱턴 포스트가 '회색전쟁'으로 명명한 이른바 21세기 첫번째 전쟁은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에 의해 '얼굴없는 테러전쟁'으로도 일컬어지고 있어 진실은 더욱 큰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테러참사에 공분(公憤)하는 미국 국민들의 90% 이상이 보복전쟁을 지지하고 있는데다 언론도 정부의 보도통제에 일정 부분 협조하는 '신사협정'에 동의해 진실이 베일에 가려질 개연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걸프전 당시에도 미국 주요 언론사들은 "전쟁에 대한 독립적 보도기능이 침해당할 우려가 크다. 국방부의 실질적인 보도통제가 훗날 미래의 미국에 모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전쟁에서 진실을 한층 치밀하게 감추는 모순이 빚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상당부분 미국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 언론의 고충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공습의 피해는 과연 실상이 어떤지, 선량한 민간인 희생자는 얼마나 발생했는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어느 쪽도 속시원히 얘기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테러의 주범이라는 물증 또한 공개되지 않고 있어 진실을 제대로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엊그제 미국에서 탄저병 환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생화학 테러 가능성만 제기하고 있을 뿐 궁금증을 더해주기만 한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전쟁 분위기 속에서 유언비어와 '카더라'방송이 난무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미국 테러참사 이후 한동안 이런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태인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단 한 명도 출근하지 않고 대피했으며, 그래서 유태인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유언비어는 익명성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이버공간을 휘저으면서 지구촌을 돌아다닌다. 실제로는 유태인 사망.실종자가 1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그렇다.

미국 테러참사가 일어난 직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는 TV 보도가 있었을 때였다. 얼마후 인터넷 세상에는 TV에 방영된 비디오가 몇년 전에 찍은 자료화면이었다는 주장이 확대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자료화면설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상황을 찍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각을 옹호하는 크고 작은 유언비어도 유포됐음은 물론이다. 그같은 유언비어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사례는 전쟁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려내기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장기전에다 확전 가능성까지 언급된 이번 전쟁이 아직 초기단계에 불과한 실정이어서 감춰지는 진실의 희생은 앞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자명하다. 그러잖아도 부시 행정부가 '더러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해 놓고 있는 마당에 진실을 캐내는 일은 미국 국익이라는 명분에 주눅이 들어 한층 힘겨울 수밖에 없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롯이 세계 언론의 몫이지만 엄연한 한계에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하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