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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칼럼>'국민정서法' 만능시대

2001-08-22
우리에겐 언제부턴가 더없이 편리한 법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인 이 법은 때로는 헌법보다 무서운 지존(至尊)으로 통한다. 국민정서라는 이름의 마법(魔法)이 그것이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에는 실정법 위에 떼거리법이 있고 떼거리법 위에 국민정서법이 있다"며 냉소를 감추지 못한다. 실제로 언론에는 '국민정서'라는 말이 하루가 멀다고 할 만큼 자주 얼굴을 내민다.국민정서법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핑곗거리로 안성맞춤이기 일쑤다. 말썽많은 평양 8.15 통일축전을 둘러싸고는 너나할 것 없이 국민정서법을 들이댄다. 한 정부당국자는 엊그제 "참가자들의 행동에 대한 국민정서를 감안하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이나 행정제재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며 예의 여의봉을 들고 나섰다. 실제 적용해야할 법규는 국가보안법이나 남북교류협력법이 불가피하겠지만 이를 저울질하는 과정에서는 국민정서라는 법을 수도 없이 앞세울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여당 대변인은 어제 "국민정서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한 데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적정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일찌감치 한 발을 걸쳐놓았다. 방북 단체의 간부도 "이번 행사가 국민정서를 고려해 어렵게 성사시킨 의미있는 일이었는데 파행을 빚어 안타깝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통일부 당국자가 당초 방북 불허방침을 정했을 때도 관계부처간 협의를 거쳤지만 어김없이 국민정서로 포장했다.

정치인들은 국민정서라는 이름의 마법을 동원하는데 관료들 못지 않게 노회하다. 지난 주말 집권당 대표는 "국민정서가 이제는 건전한 정치를 희망하고 여야가 서로 협력해 지혜를 모으기를 바라고 있다"며 야당의 정쟁 중단요구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자신들의 자세는 막상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있다. 잘잘못과 상관없이 최고지도자 역시 예외는 아님이 쉽사리 입증된다. 최근에만 해도 김대중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일관계를 언급하면서 국민정서를 무기로 삼았다.

추상같이 법을 집행해야할 당국은 또 어떤지 보자. 법무부는 광복절 특별사면과 가석방 조치를 취하면서 "조직폭력 등 고질적인 민생침해사범은 국민정서를 감안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애써 배경설명을 곁들였다. 누구보다 앞장서 실정법에 따라 정책 결정을 해야할 정부기관마저 굳이 국민정서법을 들이대야 안도하는 풍토다. 며칠 전 재정경제부가 세금공제확대 적용대상에서 룸살롱을 제외할 때도 다름 아닌 국민정서를 들먹였다. 국가 경쟁력을 역설하다가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때는 '국민정서상 시기상조'라는 한 마디로 난색을 표시하면 그만이다. 위화감이라는 법봉이 붙으면 금상첨화다. 외제차, 골프는 평소엔 조용하다가 현안이 발생하면 득달같이 국민정서법으로 단죄되곤 하는 단골메뉴다.

민간조직이라고 별로 나은 게 없다. 1주일전쯤 서울에서 국제여자핸드볼대회를 연 조직위원회는 느닷없이 경기일정을 바꾸는 바람에 외국대표들의 불필요한 불만을 샀다. 일정 변경 이유가 너무나 걸작이다.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 일본총리의 신사참배로 국민들이 격앙돼 있는 분위기를 감안해 광복절날 우리 대표팀이 일본을 이겨 국민정서에 부합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뭐든지 국민정서에 고리를 걸면 또다른 민간외교와 국익에 먹칠을 하거나 말거나 아랑곳없다.

정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 얼마전 북한 선박이 우리 영해를 침범했을 당시 군수뇌부의 골프파문이 일자 정부 고위층은 "전체 군의 사기를 감안할 때 국민정서만 고려해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역논리를 폈다. 비슷한 사안이라도 원칙없이 편리한 대로 갖다 붙인다. 해서 국민정서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비아냥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국민정서가 중요하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추상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잦은 국민정서가 항상 진리나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면 오판으로 드러나는 예가 숱하다. 게다가 국민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개인이나 소수의 정당한 권리가 설자리를 잃기 십상이다. 자칫 정치논리로 빠져들 위험성도 높다. 관성적인 국민정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논리로 대체될 때가 됐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