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3-13 |
냉전의 막바지 숨이 끊기던 무렵인 11년 전,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기자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백악관 전세기를 타고 모스크바에 출장가는 행운을 얻었다. 1991년 7월3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조인하는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두 나라의 장거리 핵무기를 30%씩 줄이기로 한 이 협정은 역사적 의미가 자못 심장(深長)했다. 초강대국이었던 양국이 군부 강경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동결 수준을 넘어 사상 처음으로 감축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핵미사일을 녹여 만든 펜으로 서명하면서 "다시는 냉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던 두 정상의 모습은 정치적인 제스처를 감안하더라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런 아버지 부시의 핵무기감축 노력과는 달리 아들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역사를 거꾸로 쓰는 핵정책을 추진하지 않느냐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져 전세계인들을 적이 실망시키고 있다. 미국 국방부가 최근 의회에 제출했다는 '핵태세검토'(NPR) 비밀보고서는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보고서에는 북한, 이란, 이라크 등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일컬었던 나라를 포함해 7개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비상대책이 담겼다. 보고서의 핵심은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안보환경에 맞는 소형 핵무기 개발을 주문하고 핵무기 사용 대상국과 사용범위를 확대하도록 권고하는 부분이다. 지난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지칭하면서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성을 언급해 세계를 경악시키고 엄청난 반핵운동을 불러왔던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파장이 커지자 미 행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의회에 제출하는 통상적인 보고서일 뿐 새로운 핵무기정책이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잇달아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쉽사리 파문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표적이 된 당사국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다. 핵목표가 북한과 중국 등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와 더욱 우려스럽게 한다. 사실 중국은 지난 64년 이후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핵무기로 선제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이다. 미국 전문가들은 이 보고서를 9.11 테러 이후 미국정부의 전략개념 변화 조짐의 하나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내용 자체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데다 새로운 지침이 부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토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보면 미 행정부쪽의 해명은 비밀보고서가 공개돼 당황한 데서 나온 듯하다. 이제 세계는 미국의 핵정책이 보복공격에서 선제공격으로 바뀌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미국의 의도는 '다른 나라 핵무기는 악이고 자국의 핵무기는 선'이라는 일방주의적 사고나 다름없다. 부시 대통령 자신이 공약한 일방적인 핵탄두 감축방안 정신과도 걸맞지 않다. 흔히 지적되는 미국의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이번 경우에도 숨김없이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 보고서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훼손가능성이 염려되고 있다. 핵무기개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을 억제할 명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중국 등에 군비경쟁 명분을 촉발할 가능성도 높다. 특히 미국이 우려하는 북한의 핵개발 개연성을 부채질하거나 핵사찰 문제가 한층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남북한이 91년 12월31일 합의한 비핵화공동선언에 차질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한반도의 핵전장화 우려가 그렇잖아도 심각한 반미 감정에 기름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미국은 이중적인 행태에서 벗어나 '핵태세검토'의 철회를 명쾌하게 천명해야 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귀신을 다시 병 속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지난(至難)한 일이겠지만 더 나아가 지난 46년 유엔총회가 최초의 결의안으로 채택했던 핵무기의 완전제거방침과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과학과 세계문제에 관한 퍽워시회의'가 지난 57년 이후 줄기차게 추진중인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해서도 아낌없이 협력해야 한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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