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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경기장 밖의 韓美戰

2002-06-10
"차라리 미국팀이 지면 좋겠다". 토머스 허버드 주한미국대사가 며칠 전 사석에서 했다는 이 말은 오늘 오후 대구에서 벌어질 한국과 미국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을 보는 외교관의 단순한 외교적 언술이 아니라 솔직한 속내일지도 모른다. 주한 미국기업인들까지 허버드 대사와 꼭같은 심경을 광고하다시피 드러낸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걸 보면 월드컵축구 한.미전의 결과가 낳을 파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축구 자체는 물론 월드컵대회에 대한 국민적 열기가 한국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외교나 기업활동에 타격을 줄 만큼 사생결단을 내야 할 까닭이 없을 법도 하다.사실 한.미전에 대한 부담감과 우려로 따지자면 주인인 한국은 손님인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과 국무총리까지 대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속사정은 행여 있을지 모를 비신사적 응원이나 반미 시위의 가공할 폭발력 때문이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일부 방송사와 익명성의 보금자리인 인터넷 공간에서는 솔트레이크동계올림픽 쇼트트랙경기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심판을 현혹한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 선수의 한(恨)을 되갚아주자며 노골적으로, 그것도 간단없이 부추기고 있다. 오노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한국 축구선수들을 욕했다는 미확인 소문이 가상공간을 떠돌아 다니면서 국민들을 자극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다 끊이지 않는 주한미군 범죄, 차기 전투기 선정과정에서 보여준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북강경책에 이르기까지 반미 소재가 다발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한.미전이 민감하기 짝이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의 주의환기로 다소 차분해진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미국 선수단은 이미 국제축구연맹(FIFA) 심판진과 같이 묵는 호텔선정에서부터 페어플레이정신을 어겨 우리 선수단과 국민의 촉각을 곤두세워 놓았다. 시저의 아내는 의심조차 받아선 안된다는 경구(警句)처럼 실제 경기에서 실낱 같은 의혹이라도 보이면 우리 국민의 누적된 감정이 어떤 형태로 분출할지 종잡기 어렵다.

이번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국민에게 가장 큰 고비이자 시험무대는 바로 오늘 오후다. 그것도 만에 하나 우리 팀이 졌을 경우다. 격앙된 분위기에 작은 성냥불이라도 붙이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역사적으로도 그저 그런 날이 아니다. 15년 전 은인자중하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 시위에 나서 독재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6.10민주항쟁의 날이자 6.10만세운동의 날이다. 그날의 시위정신을 추억하면 오늘의 응원전과 뒤풀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철통 같은 경계병력을 온 길거리에 깔아놓은 정부당국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여봐란듯이 보여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축구 종주국이면서도 '훌리건' 때문에 골치를 앓는 영국이 되기보다 작지만 품격있는 나라 덴마크의 응원단 '롤리건'을 닮기로 한 우리의 초심과 감동응원마케팅을 다시 한번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만은 시위가 여줄가리로 여겨지면 좋겠다. 대학내 집회나 사소한 시위가 있더라도 경찰이 과도하게 통제해 작은 일을 되레 키워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싶다.

3분의 1밖에 지나지 않은 이번 월드컵기간 동안 세계인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높은 점수를 벌어놓고 있다. 세계의 언론이 한국의 손님맞이와 응원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개최국에 대한 약간의 아부쯤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싶다.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국가이미지의 상승곡선을 애써 부정하거나 타매할 까닭이 없다. 어렵사리 따놓은 점수를 한 순간의 자제력 상실로 물거품을 만들기엔 소중하기 그지없다. 만약 옥생각이나 '유혹의 순간'이 엄습하면 "대구 경기 응원에 나를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김동성 선수의 의젓한 마음과 난상토론 끝에 붉은악마들의 눈총을 의식해가면서까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성조기 스카프를 매기로 결의한 대구시민 미국서포터스들의 고뇌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