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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스핀 닥터' 정치

2002-05-13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스핀 닥터(Spin Doctor) 정치의 귀재로 통한다. 그는 대중적 인기를 끌어올리고 유지하는 데 스핀 닥터의 효능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정치지도자다. 그의 정적이었던 윌리엄 헤이그 전 보수당 당수가 "스핀으로 일어선 정권은 스핀으로 망한다"고 극언으로 비난할 만큼 블레어의 스핀 닥터 정치는 절묘하다. 헤이그의 비판은 본질(Substance)은 제쳐놓고 포장(Spin)만 요란하다는 게 요체이다.하지만 헤이그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여전히 건재하다. 반면 헤이그는 집권은커녕 지난해 당수 자리마저 넘겨 줘야하는 쓴맛을 보아야 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영상매체의 위력이 높아지면서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전파하거나 필요한 경우 조작까지 하는 스핀 닥터의 역할이 한결 막중해졌다는 생생한 방증의 하나다.

스핀 닥터는 좋게 보면 '정치인 이미지 홍보전문가'로 번역되지만 '홍보기술자'나 '언론플레이 박사'쯤으로 부르는 게 적절할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이 실수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존재 가치를 더해 주는 일종의 정치 모사(謀士)인 셈이다. 스핀 닥터라는 표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84년 10월21일자 뉴욕 타임스로 알려져 있다. 미국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후보와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의 텔레비전 토론이 끝난 직후 기자실에 스핀 닥터들이 몰려들어 언론플레이에 열을 올렸다는 기사에서였다. 원래는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공에 스핀을 넣어서 던지는 커브볼 투수를 스핀 닥터로 부르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대 정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스핀 닥터 정치가 다시 만개(滿開)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전당대회에서 후보수락 연설을 한 바로 다음날 아침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해장국을 먹고 쓰레기를 치우는가 하면 서민대표 50명과 잔디밭에서 도시락 점심을 나누는 행사로 사실상 선거운동에 돌입한 것은 바로 스핀 닥터들의 작품이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이른바 노풍(盧風)이 서민정치인 이미지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오자 서민풍모 연출 경쟁에 한나라당 스핀 닥터들이 발을 벗고 나선 것이다. 사실 이후보의 스핀 닥터들은 민주당이 폭로한 호화빌라문제에 지나치게 안이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엘리트.귀족 이미지로 비치는 이후보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혹평을 감수해야 했다. 위기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내부 비판과 함께 자괴감마저 느꼈을 정도였다.

론조사에서 앞서 가는 노후보의 경우도 경선이 끝난 직후 김영삼 전대통령을 찾아가 과공비례(過恭非禮)한 언행 때문에 본래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위기를 맞았다. 말바꾸기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곧바로 복구작업에 나선 것은 스핀 닥터 효과를 뼈저리게 절감했기 때문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21세기 권력투쟁의 새로운 원천 가운데 하나로 미디어에 의한 이미지 정치를 손꼽았듯이 이제 스핀 닥터 정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그렇지만 스핀 닥터 정치의 범람은 오늘날 대중민주주의의 폐해인 감성 정치와 이미지 정치의 단점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갖는다. 진실이나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스핀 닥터 정치는 또 다른 조작 정치와 다름없다는 점을 유권자들이 새삼 유념해야할 때가 됐다.

미디어 전략가에 의해 포장되는 이미지 정치는 정책 이슈나 정당의 주의주장보다 지도자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초점이 맞춰질 위험성 또한 크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저명한 정치자문 딕 모리스가 지난해 방한했을 때 지적했듯이 요즘 유권자들은 더 이상 곁가지가 아닌 본질을 더 원한다. 본래의 모습이 아닌 연출에 의존하는 지도자가 몇 번쯤은 국민의 눈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어도 본질을 끝까지 감추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주요 후보들의 뚜렷한 개성과 노선 차이로 우리 헌정사상 어느 때보다 모범적인 정책대결이 성사될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모범적인 선례를 남길 기회가 스핀 닥터 정치의 홍수로 희석된다면 이보다 큰 비극은 없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