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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부시의 '마니교 정치학'

2002-09-09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마니교 정치학'의 신봉자인 듯하다. 그는 어떤 사안이든 극도로 단순화하길 즐긴다. 우선 잘 알려진 대로 세계를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나눠 버리곤 한다.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거나 협력하는 나라는 '친구'이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적'으로 여긴다. 마니교도 세상이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이뤄지고 두 진영 사이의 싸움이 세계사를 규정한다고 믿는다. 두 진영은 바로 빛과 어둠, 착한 편과 악한 쪽이다.마니교 정치학을 탁월하게 개념화한 사람은 독일의 카를 슈미트였다. 그는 나치의 독재국가체제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한 덕분에 국가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법학자로 일컬어진다. 슈미트는 정치 본질이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데 있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결코 떨쳐 버리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적과의 전쟁을 위해 정치적 칼을 갈고 닦는 것이 국내외 정치의 과제라는 게 슈미트의 지론이다.

중세 철학자 오캄의 '면도날 이론'을 빌리면 가장 적은 수의 단순한 기본가설을 근거로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이론이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 하지만 마니교 같은 이분법은 제3의 지대를 용납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완할 길이 없다.

마니교 정치학을 믿는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1주년을 앞두고 자신이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한 이라크와 또 한바탕 전쟁을 치를 태세처럼 보인다. '테러의 온상'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사담 후세인 정권을 그대로 두고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남아 있는 탓이다. 테러 참사 이후 최근까지 꺾이지 않고 있는 '이라크를 선제공격해야 한다'(전체의 4분의 3)는 초강경 여론조사 결과가 그를 고무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11월 중간선거까지 앞두고 있어 정치의 중요한 수단인 전쟁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라밖 형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다. 부시의 '충견'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하고 있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를 제외하곤 부시의 의도에 경쟁국은 물론 대부분의 우방국 지도자들까지 뜨악해 한다. 10여년 전 이라크의 침공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가 미국의 도움으로 되찾은 쿠웨이트조차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많다.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 때 유용하게 써 먹었던 동맹국의 전쟁동참.협력 외교전략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으나 당시와는 상황과 명분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아니 간과하고 싶을 것이다. 걸프전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침공해 주권국가의 영토를 빼앗았던 만큼 원상복구한다는 명분 하나만이라도 그럴 듯했다.

부시가 공격 명분으로 삼고 있는 이라크의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개발의혹은 무력이 아닌 외교적 노력으로 해소가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의 동맹국들마저 공격동기에 의구심을 풀지 않고 있다. 최후의 한 사람이 남더라도 바빌론의 영화(榮華)가 무참히 짓밟히게 버려둘 수는 없다는 이라크 지도계층, 나아가 이슬람 세력의 기세를 이 참에 처절하게 꺾어 놓겠다는 솔직한 의중이 아니냐는 것이다. 부시의 일거수일투족에 석유시장은 벌써부터 춤을 추며 세계경제에 위협을 가할 조짐도 나타난다. 한국엔 전쟁지원요청이 뒤따를 게 예상되는 수순이다.

"하나의 적(敵)을 찾아냄으로써 대외정책 수립의 근거를 마련하려 한다"는 미국 정치평론가 해리스의 지적대로 탈냉전 이후 미국은 마치 '적 결핍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유사 이래 평화를 앞세우지 않은 전쟁이 없었다지만 특유의 도덕성이란 이름 아래 끝없이 '평화를 위한 전쟁'의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역설투성이다. 3권분립이 뚜렷한 미국에선 헌법상 엄연히 전쟁선포권을 의회가 갖고 있으나 대통령의 의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다양성이 나라의 상징이자 이를 큰 덕목으로 삼는 미국에서 이분법적인 마니교의 도덕률이 횡행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에게 선진종교로 대접받지 못하는 마니교 신봉자라는 악명을 부여하면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양보하더라도 진정한 마니교 신봉자라면 최소한 '친구'는 제대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학순 /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