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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데스크 칼럼> 물방개 정치론

2002-11-18
대선 국면에서 전개되는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은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의 '물방개 정치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정치가는 물방개와 같은 것이다. 시냇물의 흐름에 따라 어느 때는 동행하고 어느 때는 역행하다가 또 때가 오면 동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큰 강의 흐름에는 모두가 휩쓸려 간다. 오늘의 적은 내일의 우군이요, 크게 보면 천하이지만 작게 보면 국회 안의 의원, 불과 몇백 명 가운데 하나다. 정계에는 '절대'라는 것이 없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상대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나카소네 전총리는 이 '물방개 정치론'을 후배정치인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경구(警句)로 들려주었다. 자신의 자서전에도 빠뜨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다같이 서구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오랫동안 일본의 정치행태를 알게 모르게 닮아온 우리나라 정치상황에도 나카소네의 교훈은 마치 판에 박은 듯이 현실로 다가왔다. 철새, 연어, 심지어 진드기에까지 비유되는 우리 정치인들의 둥지옮기기와 새판짜기는 물방개론의 다른 버전이거나 부분집합이다. '정치세계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오랜 법언(法諺)과 맥이 맞닿아 있기도 하다. 우리 정치인 가운데 '절대'라는 낱말을 가장 자주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 '절대'라는 맹약을 잘 지키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하면 나카소네의 충고는 적어도 정치인들이 새겨들을 만하다. 하지만 가치중립적으로 볼 때만 그럴 뿐이다.

과거 한나라당 소속이던 국회의원들이 민주당이나 자민련 등으로 말을 갈아 타서 현 정권에서 단물을 다 빨아 먹은 뒤 다시 한나라당으로 회귀하는 사례는 물방개 정치의 전형에 속한다. 그것도 가치중립이 아닌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 21 후보의 후보단일화 작업도 물방개론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출신성분과 노선, 정치적 색채의 격차가 큰 두 후보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단일화에 전격 합의한 것은 '정치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는 속설을 그대로 입증이라도 하는 듯하다. 한동안 후보단일화는 물건너갔다고 단언하던 두 후보가 극적인 입장변화를 일으킨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여론조사에서 도토리 키재기 같은 상황논리다. 평소 영어를 많이 섞어 쓰는 김경재 민주당 선대위 홍보본부장이 "Unbelievable이다(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한 첫 마디가 매우 상징적인 대목이다. 명분과 윤리는 정치적 현실 앞에 맥을 추지 못한다. 서민정치의 대표와 재벌 정치인의 극단은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 공통의 이해관계인 승리지상주의만 있을 뿐이다. 정치세력끼리의 이합집산은 서유럽국가들에서 좌우합작 정권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는 판에 뭐가 문제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정도(正道)를 걷는 정치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들이 훗날 어떤 식으로 갈라설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박근혜 미래연합 대표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쪽으로 기울어진 사실 역시 물방개 정치론으로 설명해도 충분하다. 곱게 보아 귀소본능이 작용한 '연어'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물방개가 독자노선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같이 가던 물방개를 다시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물방개로서의 박근혜 대표가 또다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 차가운 정치의 세계다.

일본정치를 욕하면서 닮아온 한국정치인들은 일정 부분 일본에 앞서 개혁을 이루었던 적도 있으나 비윤리적인 당적 바꾸기 행태만 놓고 보면 더이상 일본을 지탄할 수 없게 됐다. 일본에서 의원내각제하의 파벌정치 구태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우리처럼 무분별한 당적바꾸기를 감행하는 물방개는 찾아보기 힘들다.

정당과 정치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정권쟁취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명분과 정치윤리, 자기정체성을 넘어서는 물방개론의 교훈은 의미가 한층 퇴색된다. 나카소네의 물방개론이 정치현실에서 유용한 생존논리일지는 모르지만 유권자들에게는 단순한 타매(唾罵)의 대상을 넘어설 수 있다. 정치개혁과 미래지향성을 실천적으로 앞세우지 않는 물방개론은 정치기술결정론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인 때가 됐다.

김학순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