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08 |
가상현실을 표상하는 영화의 세계에서도 한 나라나 사회의 분위기와 정신건강상태가 곧잘 그대로 묻어난다. 이라크 침략전쟁을 함께 벌이고 있는 미국과 영국은 문화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녔음에도 대비된다.미국 영화 속의 영웅은 문명과 사회, 미덕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고독한 전사로 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슈퍼맨' '터미네이터' '람보' '포레스트 검프'를 비롯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런 속성을 띤다. 영국의 영화는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도덕적으로 다소 중립적인 영웅이 등장하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대표주자다. 슈퍼맨이 이상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미국 영웅이라면 본드는 즐길 줄 알면서도 냉소적인 영국 영웅인 셈이다. 전쟁이라는 현실세계에서도 영화 속의 속성이 투영되고 있는 듯하다. 미국 정부와 언론은 이라크전쟁에서도 끊임없이 정의의 투사와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돼 있다. 며칠 전 이라크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미국 특수부대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여군 병사 제시카 린치 일병의 경우는 영웅 만들기의 표본이자 절정을 보여준다.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다, 유치원 교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비를 벌기 위해 자원입대한 미모의 가난한 시골 소녀라는 눈물샘 자극요인이 겹쳐져 더 없는 호재이긴 하다. 게다가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의 하나인 웨스트 버지니아의 '팔레스타인'이라는 고향마을이 내뿜는 기묘한 이미지까지 가세한 터라 극적인 요소는 거의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언론이 린치가 여러 곳에 총상을 입고 끝까지 전투를 벌였다고 보도한 주요 대목들은 뻥튀기한 것으로 드러나 무리한 전쟁영웅 만들기라는 나라 안팎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화 제작과 수기(手記) 출판 제의가 이어져 린치 일병 영웅 만들기 작업은 쉬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시골사람답게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여전히 린치 일병의 간호에만 신경을 쓰겠다고 고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린치 일병의 영웅 만들기는 8년 전 보스니아 내전에 참전했던 스콧 오그래디 대위를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나더러 영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영웅이 아니다. 람보도 아니다. 단지 살기 위해 숨을 곳을 찾으려했던 겁에 질린 작은 토끼였을 뿐이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첫 미국인 희생자가 될 뻔했던 오그래디 대위가 적진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뒤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찬과 영웅적인 묘사에 손사래치며 이렇게 덧붙였던 기억이 새롭다. "진정한 영웅은 나를 구해낸 동료들이다". 군더더기 말이 필요없는 그의 진솔함이 훨씬 더 심금을 울린다. 미국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무리한 이라크전쟁 영웅 만들기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는다. 그럴 만한 소재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두 나라 국민과 언론에 이라크전쟁에 대한 시각차가 크지는 않더라도,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빗나간 전쟁영웅 만들기는 수세적인 이라크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살특공대나 인간방패가 극도의 비인도적 수단임에도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를 애국심으로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임신한 여성까지 자살특공대로 앞세우는 처사는 아무리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 하더라도 세계의 지탄을 받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비인도적 행위는 영웅 만들기 차원의 비난 정도가 아니라 전쟁범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인종전시장'이라는 별칭을 지닌 미국이 평시에도 끊임없이 영웅을 만들고, 특히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친 병사들에게 영웅대우를 하는 게 애국심과 국민통합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젊은이들에게 걸맞지 않은 처우를 하는 나라도 문제지만 왜곡된 영웅주의는 전쟁의 또다른 폐해를 낳는다. 국수주의는 이미 1일생활권이 되고 있는 지구촌의 공동체정신을 좀먹는 이기주의자를 양산하기 쉽다. 그렇잖아도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에 대한 배려는 물론 외국에 대한 지식마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더구나 안톤 오노의 경험에서 빗나간 스포츠 영웅만들기라는 쓰라린 상흔을 보았던 한국 국민들에게는 미국의 지나친 전쟁영웅 만들기가 순수하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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