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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경향의 눈>브레이크없는 日 우경화

2003-06-10
서양물건 가운데 일본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1543년 9월23일 포르투갈 상인들이 탄 배가 태풍 때문에 가고시마의 다네가시마 섬으로 밀려왔을 때였다. 이 총은 개량종으로 다시 태어나 50년 후 임진왜란의 결정타가 됐다. 당시의 총 2정은 지금도 다네가시마 종합개발센터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美묵인 아래 과거청산 미적지근
첫 박래품(舶來品)인 총이 일본 군국주의의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미국과의 태평양전쟁도 따지고 보면 총칼의 위력을 과신한 일본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낳은 셈이다. 1941년 8월 미국 현지의 첩보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한 일본군 대령은 육군 참모총장에게 미국이 일본에 비해 철강 생산능력에서 20배, 전투기 생산능력에서 5배, 총체적인 전쟁물자 생산능력에서 10배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참모총장은 훌륭한 보고서를 쓴 장교를 칭찬한 뒤 보고서를 불태워버리고는 그를 파면하고 만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대외정복이라는 연구보고서를 낸 내각 기획원 간부 역시 목이 잘렸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면서도 오늘날 세계 2위의 국방비를 쓰는 군사대국으로 우뚝선 채 과거사 망언을 서슴지 않는 데는 서양, 특히 미국이 묵시적으로 때론 공공연하게 지원한 덕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일본과 인접 아시아 국가들간의 과거사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요인의 하나는 전후 미국의 대일본 정책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전후처리 방식이 그것이다. 맥아더는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협력을 점령정책 성공의 가장 큰 열쇠로 여겼다. 국왕의 전쟁 책임을 면책하는 대신 국왕은 일본 점령에 전적으로 협력한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청산과 더불어 미래를 향해 환골탈태한 독일과 다른 길을 걸은 데는 미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이은 미국의 친일본 정책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웃나라들로 하여금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만든 것이다.

냉전 기간에도 일본은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묵인 아래 자위대 군사력을 증강해 왔고, 그 사이에도 식민지배체제에 대한 궤변과 망언이 끊이지 않았음은 잘 알려진 대로다. 탈냉전 후에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져 일본의 최첨단 무장과 이를 위한 입법 뒷받침이 거침없이 이뤄져 오고 있다.

일본은 협상전술의 하나인 '살라미 전술'을 원용한 특유의 수완으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걸어왔다. 소시지를 얇게 썰어나가듯 조금씩 진전시키는 '살라미 전술'은 이웃나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곤 했지만 그 순간의 우려로 끝나게 만드는 특효약이었다. 인접국가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끓는 냄비 물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감각이 무디어질 법도 하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군사.외교적 성역과 금기는 하나씩 깨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訪日)을 전후해 보여준 일본 정치권의 막무가내와 오만은 미적지근한 과거사 청산의 전형적인 잔재다. 방일 직전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정조회장의 '자발적 창씨개명' 발언과 유감 표명은 상습적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수법이었음에도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미온적인 편이었다. 방일 1시간 전에 전시대비법인 유사법제를 참의원에서 통과시키고, 자민당 총무회에서 아소의 창씨개명 망언에 동조하는 발언이 이어진 것은 외교적 무례다.

실력 기르는 것이 현실적 대안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대로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과거사 해법일까. 이제 앞을 보고 가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독일만큼 과거 청산작업이 진행됐다면 그래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가해국가는 오만과 망언을 서슴지 않는데도 피해국가만 미래지향적으로 가도 괜찮은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앞으로도 한국보다 일본에 애정을 더 쏟을 게 틀림없다. 노대통령이 방일 결산 기자간담회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국민이 일본의 오만과 무례가 다시는 없도록 힘을 기르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문제는 우리가 일본에 맞설 수 있도록 힘을 기르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이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