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29 |
미국은 이라크전쟁 초반 바그다드의 방공망을 초토화하고 지상군을 투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적군의 저항이 만만찮은 상황에 이르자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를 떠올렸다. 베트남전의 재판(再版)이 되거나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승리'가 될 수 있다는 초조감이었다. 악몽같은 전황은 미군 수뇌부는 물론 세계의 군사전문가들과 언론의 예단까지 가세하면서 현실화되는 듯했다. '피로스의 승리'는 고대 군사강국 에피로스가 기원전 279년 로마군과 아드리아해 부근에서 벌인 혈전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얻어낸 승전보 이후 고사성어로 정착된 것이다. "이런 승리를 한번 더 거두었다간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피로스 왕이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듯이 했다는 말은 오늘날엔 그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이기고도 엄청난 희생' 교훈 미국 수뇌부의 걱정이 기우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전 3주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국은 지난 5월1일까지 한동안 여유를 가진 뒤에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주요전투 승리를 선언할 정도였다. 하지만 승전보를 제대로 구가하기도 전에 미국 정부는 '카드모스의 승리'(Cadmean Victory)를 심려(深慮)할 지경이 됐다. '카드모스의 승리'는 이긴 뒤에 더 큰 재난을 불러오거나 새로운 시련을 초래하는 형국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카드모스의 승리'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고 있다. 테베 왕국을 세운 카드모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죽인 용을 처치한 뒤 아테나 여신의 충고대로 그 이빨을 땅에 뿌렸다. 그렇지만 용의 이빨들이 모두 무장한 전사들로 변해 다시 공격해 오는 바람에 더 많은 군사를 잃었다. 요즘 이라크 주둔 미군 병사들이 "차라리 전쟁이 더 쉬웠다"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걸 보면 '카드모스의 승리'를 절감하는 듯하다. 후세인의 두 아들이 사살됐음에도 외려 추종세력들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베트남전에 버금가는 수렁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미국의 고민은 여전히 유효하다. 3주간의 전투에서 139명에 불과하던 미군 사망자는 부시의 주요전투 종결선언 이후 현재까지 하루 평균 12∼13차례 피습으로 속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군의 조기 철수는커녕 앞으로 5년 이상 주둔해야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라크전을 승리로 이끈 뒤 다음달 전역하는 용단을 내린 토미 프랭크스 전 중부사령관은 그에 앞서 이미 "이라크는 점령보다 유지가 훨씬 어려울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것보다 더 큰 시련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 왜곡이 국제적인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가장 큰 명분으로 내걸었던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허위사실로 판명된 것은 더말할 것도 없이 정보까지 조작했음이 들통나 미국과 부시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일은 승전만으로 만회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피로스의 승리'나 '카드모스의 승리'는 순서만 다를 뿐 승리에 비해 대가가 너무 비싸다는 결과는 마찬가지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에서 연승했지만 무리한 밀어붙이기 전쟁이 낳은 자충수는 쉽사리 치유될 상처가 아니다. 북한 핵문제에 관한 해법을 찾고 있는 부시 행정부에 이같은 '카드모스의 승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核위기 美책임론' 깊이 새겨야 대화국면으로 바뀌었다는 징후에도 불구하고 언제 다시 신보수주의 강경파가 전의를 드러낼지 알 수 없는 게 북한 핵문제에 관한 미국의 태도다. 대화의 장이 마련된 뒤에라도 부시의 재선을 의식해 시간벌기 전략으로 실질적인 진전을 천연시키려 든다면 불행의 씨앗이 싹틀 수 있다. 북핵위기는 미국에도 책임이 있다는 르몽드의 지적이 단순한 비판만은 아니다. 최근 미국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에서 이라크의 경우를 연상하는 전문가들이 부쩍 늘었다는 점도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높여주는 요인의 하나다. 전쟁강국 에피로스도 잇단 승리에 도취해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고 인심을 잃는 바람에 피로스왕의 예언대로 결국 당대에 멸망하고 말았던 선례는 재선 가도에 들어선 부시 진영에도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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