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종남산 지름길'과 총선

2003-12-10
중국 고사 '종남산 지름길'은 출세와 영달의 첩경을 상징한다. 종남산은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 남서쪽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종남첩경(終南捷徑)은 깊디깊은 산중에 은거하면서 이름값을 올린 뒤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는 우회전술을 쓰는 선비들이 많았던 데서 유래한다. 종남산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비단병풍처럼 둘러싸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은둔자들에게 자연스레 인기가 높았다. 중국에서는 은둔자가 현인으로 여겨졌고, 깊이 은거할수록 명성의 높이는 그에 비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종남산 지름길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당나라 현종 때 노장용(盧藏用)은 진사 시험에 급제한 뒤에도 쉽게 임용되지 않아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당나라에서는 과거급제가 곧 벼슬길로 가는 자격증이어서 경쟁의 치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막상 과거에 급제했더라도 바로 임용되는 것은 아니며, 소망하는 자리에 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실의에 차 있던 그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종남산에 들어가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종남산에는 학문과 자기 수련만 할 뿐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은거하고 있었다.

관직 노리고 종남산 은거 몇 년 뒤 노장용의 명성은 조정의 관심을 끌게 되어 마침내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그의 전략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것이다. 당시 종남산에는 사마승정(司馬承幀)이라는 명실상부한 현인이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조정에서 관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그가 어느날 장안에 왔다가 돌아갈 때 성 밖까지 배웅한 사람이 노장용이었다. 노장용은 멀리 보이는 종남산을 가리키며 한마디했다. "종남산은 참으로 영험이 있는 산이지요." 그러자 사마승정은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엔 벼슬자리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오." 노장용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음은 물론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노장용처럼 '종남산 지름길'식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 결코 적지 않다. 첩첩산중은 아니지만 재야나 학계가 종남산 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그곳에서 이름값을 높인 이들 가운데 능력 이상의 관직에 오른 사람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국가고시를 통한 관직보다 훨씬 쉽고 세속의 영달도 컸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관계로 가는 출세 지름길도 시대마다 차이가 났다. 군사정권 시절엔 육사를 비롯한 군문에 드는 것을 제일의 첩경으로 여겼고, 민주화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는 대학 교수와 운동권, 참여정부에선 운동권과 더불어 시민단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경향이 짙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교수는 고위 관직의 가장 손쉬운 지름길의 하나가 돼 왔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교수는 대부분 장관급 이상인데다 아무리 낮아도 차관급은 보장받았다.

어느 시대건 현실정치를 올바로 주도할 인물들이 필수불가결하긴 하다. 불후의 명저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백이.숙제(伯夷.叔齊)같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나라의 공신인 소하(蕭何)나 조참(曹參)처럼 시세를 탈 줄 아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끈다고 믿었듯이 말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조차 스스로 벼슬과 거리를 두었지만 율곡 이이(李珥)가 관직을 그만두려고 할 때마다 만류하곤 했지 않은가.

현정권이라고 또다른 종남산 지름길이 없지 않다. 여의도로 가는 지름길이 마치 청와대와 내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북악산으로 상징되는 청와대와 내각은 '북악산 지름길'이라는 조어가 어울릴 법하다. 본의든 아니든 상관없다. 스스로 애써 만들지 않아도 북악산 지름길을 닦아주는 세력까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靑.내각 올인전략 불신만 정신적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 어쩌면 최소한 참패는 막아보자는 전략 가운데 하나로 여전히 북악산 지름길에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강제 동원령'은 없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여당은 '총동원령'을 거둬들이지 않을 태세다. 공공연히 "영남지역에선 장관 프리미엄이 필요하다"는 인사들도 있다.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이름값 올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모습도 엿보인다. 하지만 속칭 '올인전략'은 국민의 국정불신을 가중시킬 따름이다.

김학순 본사 미디어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