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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한국어가 중국어에 포위되는날

2004-12-29
나라 안팎으로 심란하기 그지없는 소식으로 가득한 세밑에 스쳐 지나가기 십상인 자그마한 두 가지 뉴스가 기자의 눈길을 새삼 사로잡는다. 며칠전 경향신문 베이징 특파원이 보내온 기사와 뉴욕 타임스가 베를린에서 전한 독일 소식이 그것이다.베이징 뉴스는 중국 정부가 중국어를 영어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어로 키우기 위해 야심찬 전략을 수립하여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발 기사는 이와 정반대다. 전세계적인 영어 범람 속에 일상 독일어가 영어에 밀리는 '언어의 제국주의화'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소식이다.

외국인 3천만명 중국어 공부 중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을 5년 안에 1억명으로 늘리려는 중국어 세계화 전략은 가히 공룡국가답다.

이미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은 100여개국 2,300개 대학의 3천만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이 첫 표적국가가 된 것에는 반드시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다. 해외에서 중국어 교육을 맡게 될 공자학원(孔子學院) 1호가 서울에 문을 연 것은 중국 내 해외 유학생 절반이 한국 학생일 정도로 중국어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때문이다.

중국어의 위력은 영국의 데이비드 그래돌 같은 언어학자가 이미 통찰한 바 있다. 국제사회에서 영어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반면 중국어가 필수언어로 떠오른다는 게 그래돌 박사의 예견이다. 그것도 아시아 지역에선 10년 안에 중국어가 반드시 배워야 할 언어가 된다는 전망이다.

영어의 위력은 철혈재상으로 불리는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가 한 세기도 훨씬 전에 꿰뚫고 있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독일 기업들이 앞다투어 광고에 영어를 쓰거나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뎅글리시(Denglish)를 부추기는 바람에 독일어가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는 현상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언어의 운명도 종국엔 경제로 귀결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혜안이다. "어떤 언어가 세계어가 되는 데는 딱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힘이다. 그 언어를 배우면 경제적 이익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데이비드 크리스털 웨일스대 명예교수 역시 경제결정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세계 6,800여개 언어 가운데 2주일마다 1개꼴이 사라지고 있다는 월드워치연구소 보고서에 언젠가 한글이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걱정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한글은 시나브로 영어와 일본어에다 중국어의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할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수천년 동안 한자와 중국어의 문화적 제국주의 아래 놓여 있다가 또다시 중국어의 위협을 실감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한글이 전세계 언어학자가 인정하는 최우수 언어임엔 틀림없다. 더구나 정보기술(IT) 시대의 미래언어로 경쟁력을 갖춘 언어 중의 하나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중국어와 일본어가 35초나 걸리는 데 비해 한글로는 5초면 끝난다. 컴퓨터 자판의 효율성도 마찬가지다.

언어운명 경제와 상관관계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한류(韓流)를 타고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한국어에 마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한글의 세계화에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한글의 영향력 확대는 살아남기 경쟁을 벌여야 하는 소수언어의 숙명적 과제이기도 하다. 수세적인 소극전법이 아닌 공세적 전략이 한층 요긴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쪽이든 경제력에 비례하고, 경제를 키워야 하는 까닭이 국민의 복지 같은 국내용에만 있지 않음을 방증한다. 경제 살리기는 이래저래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