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16 |
중세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귀족들이 속칭 '야자타임' 같은 신분 역전 시간을 만들어 즐기는 관습이 있었다. 이 연회의 사회를 맡아 보는 사람을 '무질서의 지배자'(Lord of Misrule)라고 불렀다. '무질서의 지배자'는 언제나 평민이나 노예 중에서 뽑혔다. 그는 연회장에서 왕처럼 굴었고, 참석자들도 그를 왕처럼 받드는 장난기 어린 시늉을 한다. '무질서의 지배자'는 잠깐 동안이나마 기존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뒤집거나 풍자하곤 한다. 물론 짧은 무질서가 끝나고 나면 기존 질서가 곧바로 회복된다. 깨달음준 유럽식 ‘야자타임’ 이와 흡사한 현실 역전 현상은 유럽의 다른 사회에서도 있었다. 도제(徒弟)가 하루 이틀 동안 장인(匠人) 역할을 하거나, 하룻동안 남녀가 서로 반대의 일을 하고 처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분 역전의 역설'은 중국의 학자들도 즐겼다. '무질서의 지배자' 놀이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함축돼 있다. 여기서 비롯되는 지혜는 허위의식을 줄이면서 직관적인 깨달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런 역지사지의 지혜를 국제정치의 무대로 들고 나오면 어떨까 싶다. 그것도 뜨거운 감자 같은 국제 현안으로 불거진 북한 핵문제에 적용해 본다면 말이다. 그러잖아도 난마처럼 얽힌 북핵 위기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 공식선언으로 해법찾기가 더없이 난분분하다. '치밀하고도 다각적인 대응전략을 수립하라'에서부터 '당당하게 하라' '경고음을 발하라' '고립시켜라' '타협하라'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은 넓으나 하나같이 두루뭉술함 그 자체다. 게다가 '서둘러라'라는 조급증까지 지배한다. 여기에 새롭지도 않아 보이는 역지사지 접근법을 추가하면 또 하나의 하나마나한 원칙론에 불과하지 않을까 두렵긴 하다. 다만 서로 마음 속으로만이 아닌 실질적이고 세밀한 무대 뒤의 역지사지 접근법이면 작은 실마리라도 잡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실제로 다소 공허하다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품평이 돌아올 수도 있겠으나 워낙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풀기가 쉽지 않은 북핵문제여서 잠시나마 미국과 북한이 입장을 바꿔 호흡을 고르는 것도 전혀 무득하지는 않을 법하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하는 척도의 하나가 바로 역지사지의 능력임에랴. 역지사지의 지혜는 힘이 엇비슷한 경우에는 적용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게 통설처럼 돼 있다. 팽팽한 균형이 깨지기 힘든 상황에서는 한 쪽이 참패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역지사지 접근법이 약간은 더 유효하거나 부담이 적을지도 모른다. 힘의 균형이 확실히 깨졌을 때 역지사지가 가장 효과적이고 갈등해소 확률이 높다는 이론이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면 북한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기대치가 없지는 않을 듯하다. 신뢰바탕 강자의 포용 필요 이때 강한 쪽이 약한 쪽에 역지사지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사 규칙이 지켜져야 한다. 자연히 두 당사자 가운데 미국측에 포용성이 조금은 더 실려야 한다. 그 옛날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포로를 잡으면 절대로 고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자신이 포로가 될 수 있다는 마음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님의 말처럼 서로 다른 위치에서 다르게 볼 줄 알아야 세상은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국제정치의 갈등해결 방법으로서 역지사지의 유효성을 한번 더 믿어봄직하다. 역지사지는 공멸이 아닌 공승(共勝)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북핵문제의 가장 큰 핵심이자 장애물은 미국과 북한의 상호불신이다. 어쩌면 1∼2년도 넘게 걸릴지 모르는 지루한 지구전이 될 숙제다. 한국을 비롯한 관련국들도 두 당사국에 다양한 외교형태와 더불어 역지사지 해법을 권해 보면 어떨까.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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