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13 |
지난주 '말 속의 말'은 단연 일본이 낳은 야구 천재 스즈키 이치로(鈴木一郞)의 촌철살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미숙한 사람이다." 그 한마디는 모순형용의 수사학을 빌리면 '평범한 비범'이었기에 말도 많은 경제난에다 짜증스런 갈등과 분열로 열패감에 젖어있는 한국인들의 폐부를 찌르고 남았다.日 이치로 '국민영예상' 사양 무려 84년 동안 난공불락이던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의 한 시즌 최다 안타기록을 여봐란듯이 깨버린 이치로가 일본 정부의 '국민영예상' 제의를 두 번째 사양하면서 이처럼 겸손하다니. 미국 진출 첫해인 2001년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 겸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직후 이미 한 차례 제의가 있었던 터라 웬만한 선수라면 "무한한 영광이다.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겠다"며 슬그머니 받아들였음직한 데도 서른한 살의 그는 끝내 도리질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위대한 선수"라고 치켜세우지 않아도 이치로의 위업은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가 이승엽, 아니 최희섭이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그에게 갈채를 아끼지 않았던 우리는 노벨상 수상자와 같은 반열의 국위 선양자에게 주는 국민영예상을 마다한 이치로의 영웅적인 겸손에 한번 더 가슴이 찡해진다. 사실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장 넘기 힘든 장벽이 겸손의 반대말인 오만이다. 오죽하면 성경에 겸손을 주문한 구절이 32곳이나 될까. 가수 조영남도 '겸손은 힘들어'란 퍽 특이한 노래로 이를 방증해 준다. "…돌아가신 울아버지 울어머니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되는 것은 딱 한가지/그건 겸손이라네." 이치로의 겸양은 그래서 빛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이치로가 큰바위 얼굴로 투영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은 권력대로,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가진 자는 가진 자들대로, 젊은이들은 또 그들대로, 심지어 장삼이사(張三李四)에 이르기까지 오만은 도처에 널브러져 나뒹군다. 겸양은 발붙이고 살기조차 어렵게 돼 버린 느낌이다. 어쩌면 오만은 풍토병처럼 대지를 휩쓸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도자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말을 좀처럼 곧이 들으려하지 않는다. 보좌진도 덩달아 '나만 옳다' '우리만 옳다'를 외쳐댄다. 집권당도 매양 같다. 동류의식을 가질 만도 한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의 표현대로라면 열린우리당은 양산박당이다. 108명의 못 말리는 초선의원들이 저만 잘났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지난날 몸을 던져 뜻깊은 일을 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무오류 의식의 덫에 걸릴 때가 숱하다. 마치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는 '후브리스' 같다. 모르면 용감해진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 얕은 개울물은 요란하게 흐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없이 흘러간다. 오만한 한국사회 새겨볼만 대학입시를 둘러싼 편가르기 역시 각자의 오만 탓에 접점찾기보다 감정싸움으로 일관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국내 최고의 대학이 세계무대에선 150위권에 겨우 턱걸이하고 있는데도 우물안에서만 드잡이질한다. 졸부 근성은 또 어떤가. 실업자는 넘쳐나고 먹고 살기조차 힘들다는 데도 너나없이 명품이 아니면 거들떠 보질 않고, 술집에선 최고급 양주가 아니면 위장이 상하는 줄 안다. 지각이 부족한 젊은이들은 얕은 지식과 알량한 경험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으스댄다. 여전히 변방국가이면서 중심국가처럼 방자하다. 크고 강한 나라는 우습게 여기며, 작고 힘없는 나라는 업신여기는 오만이 판을 친다. 중국의 오늘을 만든 덩샤오핑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힘을 길러 때를 기다리라)를 그토록 당부한 까닭을 되새겨보자. 이제 좀 겸손해지자, 대한민국이여. 김학순 본사 미디어전략 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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