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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일본편만 드는 미국

2005-04-11
한국과 일본 사이에 사활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개입될 때마다 미국이 알게 모르게 일본편에 서는 역사적 악몽에 우리는 시달리곤 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역사문제가 끝내 미결인 채로 남게 된 것도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대일본정책이 결정적인 요인 가운데 하나다. 바로 미국정부를 대표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전후처리방식 때문이다. 맥아더는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협력을 점령정책 성공의 열쇠로 여겼다. 해서 일왕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대가로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전적으로 협력한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잠시 축출되었던 일본 전범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일관계가 변화하면서 정계에 복귀하는 바람에 일본정치의 우경화를 부채질했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희석시킨 일이 과거사문제 해결의 크디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과거사 청산의 모범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이 피해를 입힌 주변국들에 도리어 큰소리치는 지경에 이른 것은 미국이 오늘날까지 기를 살려주고 있는 탓이 결코 작지 않다.

1965년에 체결된 문제의 한.일 협정도 미국이 한국정부의 등을 떠밀어 서둘렀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51년 10월 한.일회담의 시작부터 미국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한.일관계의 안정이 냉전 초기 미국 동북아정책의 핵심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이 1905년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한 원초적 악연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다. 훗날 대통령까지 된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의 가쓰라 다로(桂太郞) 총리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침탈을 맞바꾸는 음모를 꾸몄다.

러.일전쟁 후 포츠머스에서 맺은 강화조약에서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적인 우월권을 인정하도록 중재한 것 역시 미국이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미국이 불과 1주일 만에 서방국가로서는 맨 먼저 대한제국과 국교를 단절하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보인다. 서방국가로서는 최초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게 미국이다.

독도문제만해도 일본은 패전 후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한국의 독도영유권이 빠진 점을 빌미의 하나로 삼고 있다. 일본의 끈질긴 로비로 미국이 작성한 초안에서 독도영유권은 삭제되었고 연합국은 그대로 서명한 것이다. 미국은 지금도 독도문제 불개입원칙을 지키며 중앙정보국의 국가정보보고서에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로 일본이 국제사회에 퍼뜨리고 있는 '리앙쿠르 바위섬'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 시나브로 우향우하는 현상은 미국의 부추김이나 묵인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은 이웃 나라들의 우려에 대해서는 이른바 '병마개이론'으로 방어하곤 한다. 미국이 일본을 병마개처럼 막고 있는 한 지나친 군사대국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적극 찬성하는 미국이 지난주 말을 넘기면서 연내 결정거부로 바뀐 것은 한국의 반대입장보다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의사가 워낙 강고하기 때문인 듯하다. 지난 8일 국무부 정례브리핑 때까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던 미국정부가 별도의 서면 언급에서 "일본의 교과서에서 제기되는 우려를 인식하고 있다"는 수준으로 변화된 것 역시 한국여론보다 중국의 반일시위가 워낙 거세졌기 때문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미국이 한.일관계의 특수성을 잘 알면서 애써 일본편들기만 하는 것은 훗날 또 다른 오판을 낳을지도 모른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호러스 N 앨런의 예언적 경고가 일본의 진주만 침공으로 현실화됐듯이 말이다. 일본의 한반도 병탄 용인을 끝까지 반대했던 앨런은 "훗날 일본은 분명히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때가 되면 미국에 칼을 겨누어 전쟁상태로 돌입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들어 한.미관계에 파열음이 들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이 한.일간의 문제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