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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 '어영부영 40%'의 균형자론

2005-05-09

'지지계층 30% 반대계층 30% 어영부영 40%'.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지난 재.보선 패배 직후 차기 대선전략을 위한 유권자 계층의 역학구도를 분석하면서 운위한 '어영부영 40%'는 용어선택에 문제가 있었지만 애교로 봐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문의장의 표현대로 선거판에서 '어영부영 40%'를 잡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라는 점은 비율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민주국가에 적용되는 선거구도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기회주의자랄 수도 있으나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이야말로 변화를 위한 균형자인 셈이다. 논란의 대상으로 따지자면 말도 많은 동북아 균형자론보다 '어영부영 40%'의 균형자론이 훨씬 더 설득력을 지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당 내부에서는 40%를 잡는 방법론을 둘러싼 노선갈등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정부.여당의 자만을 채찍질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음에도 차기 대선 필승론과 20년 장기집권론의 수위가 그리 낮아지지 않은 듯하다. "(한나라당에서) 누가 나오든 다음 대선에서도 우리가 이긴다"고 현직 총리가 장담하던 필승론은 재.보선 전패 후에도 여당의 책임 있는 인사들에게서 공공연하게 들려온다. "우리는 정규리그에 약하다. 그러나 한국 시리즈에서는 반드시 이긴다". 결코 자기 위안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심각성이 엄존한다.

작은 게임의 승패가 누구 탓이냐를 넘어 그와 상관없이 "(시대 흐름이) 큰 게임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는 안일한 논리와 언술은 오만으로까지 이어지기 쉽다. 그것도 한두 번쯤이라면 자기최면 정도로 여길 만하나 외부를 향한 메아리 없는 외침은 주술(呪術) 수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스포츠에서는 물론 모든 분야에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는 순간 실패가 잉태되는 성공 신드롬이 깃들기 시작하는 법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젊은 여당이 각개약진, 지리멸렬 등 부정적인 4자성어로 회자되고 있음에도 겸손과 성찰의 진정성이 그리 엿보이지 않는다. 앞서 가던 분야마저 이미 야당에 추월당하는 모습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도 개전의 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선거의 승패를 결정짓는 젊은 유권자들의 광장인 인터넷과 디지털 마인드에서 일부 역전을 허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자구노력의 목소리가 다급하기는커녕 잘 들리지도 않는다.

존 F 케네디가 언급한 "현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지적을 어디서도 발견하기 어렵다. 다음 대선에 개혁이란 단순 이슈는 더 이상 약발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낮지 않다. 오히려 정.반.합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이 유효할 수도 있다. 수구 보수로 지탄받던 정권에 질린 국민들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대안을 고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 서민층은 미국에서 생겨난 '리무진 리버럴'(리무진을 타는 진보주의자)이란 조어(造語)를 벌써 떠올리기도 한다. 말은 서민들을 위하는 척하면서도 자신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은 과거 기득권자들과 닮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 시각이다.

시중에 나도는 '대통령과 밥솥' 패러디는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돈을 꾸어 와서 밥솥을 하나 샀고, 박정희 대통령이 벼농사를 잘 지어서 그 솥에 맛있는 밥을 지어놓았으나 자신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이 그걸 맛있게 다 먹어 치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솥에 남아 있던 누룽지라도 먹어야겠다며 그걸 달달 긁어 먹었다. 화가 난 김영삼 대통령은 빈 밥솥을 내던져 그마저 깨뜨리고 말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 밥솥을 사야겠기에 신용카드를 긁어 장만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전기 코드를 잘못 꼽는 바람에 새 솥이 쓸모없게 돼버렸다."
당시 경제정책과 대통령의 특징을 패러디한 이야기는 웃어넘기고 말기엔 시사하는 게 많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해학이 담겨 있다. 다음 대통령과 정권이 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해답이 나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선거에서 '어영부영 40%'는 자만하는 세력에겐 결코 어영부영하지 않고 언제나 가차없는 심판을 내려왔음을 잊어버려도 좋다. 권력을 내놓으려면 말이다.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