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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아침을 열며>"아마추어 국정" VS "관료주의 발호"

2005-06-06
천주교 신자인 데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던 소설가 춘원 이광수가 법화경(法華經)을 번역하겠다며 발벗고 나섰다. 그러자 춘원의 사촌동생이자 역경사(譯經師)였던 운허(耘虛) 스님이 청담(淸潭) 스님에게 득달같이 달려갔다. 형의 번역작업을 만류해 달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법화경을 소설가적인 식견으로 잘못 번역해 놓더라도 그의 명성 때문에 독자들이 옳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크게 염려해서다.

청담은 춘원을 찾아가 그가 지금 법화경을 번역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면서 중단을 간곡히 요청했다. 한문 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불교에 대한 공력도 나름대로 갖추었다고 자부하던 춘원은 물러설 줄 몰랐다. 춘원은 "그러면 1주일이든 2주일이든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하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춘원의 제의를 청담은 흔쾌히 수락했다. 법화경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춘원은 두 손을 들었다. 그때 청담은 춘원에게 원각경(圓覺經)과 능엄경(楞嚴經)을 먼저 공부할 것을 정중하게 권했다. 3년 뒤 청담을 다시 만난 춘원은 "원각경을 공부한 뒤 법화경을 보니 그 깊은 뜻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내 고집대로 3년 전에 번역을 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소회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보수진영과 야당으로부터 아마추어 논란을 빚다가 '유전 게이트'와 '행담도 개발' 스캔들을 기화로 마침내 여권 내부에서조차 비슷한 공격을 받고 있는 참여정부에 시사점이 많은 예화다. 춘원과 참여정부가 토론을 즐기는 것까지 흡사하니 말이다.

봇물이 터진 여권 내부는 마치 백화제방(百花齊放)을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상주의자로 비판하는 열린우리당 간부까지 나섰으니 갈 데까지 가고 있는 모습이다. 각종 위원회의 총점검에서부터 정부정책의 전면 재검토, 청와대 인적쇄신 요구에 이르기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일부 386세대 의원은 비판하는 경제 각료 출신 의원들을 겨냥해 '숨죽이고 있던 고질적인 관료주의의 발호'로 되받아치면서 여권 내부는 쑤셔놓은 벌집 같다. 국정쇄신 논쟁이 노선싸움이나 자리다툼으로 비치기도 하면서 점입가경이다. 내 탓이냐 네 탓이냐 논란으로 비화하면서 볼썽도 점점 사나워진다.

논란의 중심에 청와대가 있다는 것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이번만큼은 피해가기 어려울 듯하다. 따지고 보면 언제부턴가 청와대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진 지 오래다. 전통과 관례가 시나브로 무너지기 시작한 게 민주화 정부가 처음으로 들어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부터라고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군사정권은 정통성 부재에 대한 비판을 최고 엘리트 인재를 거느린 청와대의 상징성으로 윤색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위기의 근본은 청와대에 있다. 청와대가 일을 배우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한 여당 의원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상황분석이다. 아무리 "아마추어가 희망이다"라고 외쳐봐야 산이 없는 광야에서는 메아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열린우리당 쪽에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참여정부 인사들의 한계 가운데 하나도 정당한 비판이나 지적을 지그시 참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차라리 뭇매를 맞기만 하면 때로는 일말의 동정심을 살 수도 있으나 변명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모습이 도리어 부메랑처럼 돌아오곤 한다. 대통령이 도대체 당신들은 당하고만 사느냐고 알게 모르게 압박하는 일이 적지 않아 나타나는 홍보 전략의 오류다.

지금 한.미 정상회담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듯한 노무현 대통령은 워싱턴에 다녀오자마자 혁신정부를 기치로 내걸었던 내각과 청와대를 제대로 혁신하지 않으면 여론을 견뎌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반환점을 돌기 시작한 노대통령과 여권이 엄혹한 시험대에 올라 있음이 분명하다. 청담의 얘기를 귀담아 들은 춘원이 현 정부에도 훌륭한 교사일 성싶다.

김학순 미디어칸 대표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