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01 |
기자가 사는 곳은 지하철 역에서 내려 재래시장과 서민상가가 빼곡히 들어찬 길을 지나야 하는 아파트 단지다. 얼마 전까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분의 지역구에 속하기도 한다. 그만큼 현 정부에 우호적이던 주민이 많이 산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 변두리에 자리한 이 곳의 민심은 요즘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납다. 지난 주말 이 곳 쉼터의 작은 화젯거리는 군 훈련소 중대장의 위장 훈련병 체험이었다. 태풍급 위력을 지닌 안기부 도청 X파일 사건에다 대통령의 느닷없는 연정 제의로 온통 뒤숭숭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한줄기의 청량한 바람 같은 일화였기 때문인 듯하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군대 얘기만 나오면 한마디쯤은 거들어야지 뒷전에서 듣고만 있지 못하는 성정인 데다 최근 잦은 병영사고까지 있던 터라 금세 뜨거운 안줏거리로 돌변했다. 갓 일등병이 된 아들을 둔 기자로선 귀가 한층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의 담론은 흔히 그렇듯 이내 대통령에게 비화되고 여기저기서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비판의 화살이 쉴새없이 날아들었다. 훈련소 중대장처럼 세상물정을 뼈저리게 체험해야 할 사람은 정작 대통령이라는 상상력은 자못 그럴 듯했다. 왕조 시대에 임금이 평민 복장을 하고 나가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사전 시나리오 없이 있는 그대로 듣는 '미복잠행(微服潛行)'을 하듯 대통령도 변장(變裝)을 하고 경호원 몇 명만 대동한 채 민심탐방을 실행해 봄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 팍팍한 삶에 몸과 마음이 고단한 서민들은 대통령의 뜬금없는 연정론에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국민은 저를 외교나 경제를 잘 할 것이라고 뽑은 게 아니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절망의 극치를 맛본다. 경제와 외교.안보가 국정의 두 수레바퀴라는 사실은 공맹(孔孟)시절에도 강조되었을 만큼 머나먼 옛적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핵심과제이니 말이다. 대통령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언론마저 고개를 내젓는 국면이면 참모들도 한번쯤 의문을 품어봐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한 극우보수주의자가 '대통령의 정신감정'까지 운운한 것은 망발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국민정서는 적어도 수사학의 문제점을 제외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다. 민생경제는 불볕더위만큼이나 힘겹고 외교.안보분야에선 한반도의 미래가 달려있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열리고 있는 엄중한 시점이다. 민감한 현안을 목전에 두고 훌쩍 휴가를 떠난 대통령이지만 청와대로 귀환한 뒤 '현대판 미복잠행'인 변장 민심탐방에 나서 국민들의 진심을 속속들이 점검해 중점과제를 검토하길 간곡하게 희구하는 것이 불경죄가 아니었으면 싶다. 우리네 역대 대통령들이 민생 살피기에 나선 적은 많지만 미복잠행 사례는 흔치 않았다. 새벽녘 해장국집에 들러 택시운전기사와 환경미화원을 만나고 최전방 초소로 병사들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대부분 짜인 각본에 따른 것이어서 생생한 목소리는 접하기 어려웠다. 서민의 애환을 듣는 민생탐방이라도 신분이 알려지면 대통령 앞에서 육두문자까지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관계부처 장관이나 참모가 수행하는 민생탐방은 전시효과를 거둘지는 모르지만 시정의 민심을 제대로 측정하긴 어렵다. 신분을 숨기고 세간에 나와 아파트값 폭등에 분노하며 경기침체로 고통받는 삶의 현장을 둘러보라는 얘기다.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북한 핵보다 더 무서운 핵폭탄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택시도 타 보고, 소줏집 안주가 삼겹살뿐인지, 대통령 비판 버전은 얼마나 많고 살벌한지 직접 살펴보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란 걸 절감할 게 틀림없다. 미복잠행의 효과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인의 장막에 가려지지 않은 민심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각료와 참모진의 긴장감도 더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임기의 반환점을 도는 대통령이 지난 대선 막바지에 상영된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처럼 잠행 탐방을 바탕삼아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지지율도 회복하길 기대하면 때늦은 과욕일까. 김학순 미디어칸대표 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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