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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김학순 칼럼> 6자회담 '트롤로프의 수'

2005-09-14
쿠바 미사일 사태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기념비적 사건의 하나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귀감이 담겼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62년 10월15일 소련이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중거리 핵미사일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인 사실이 발각되고 나서 미사일 철수를 선언하기까지 13일 동안은 역사상 초강대국 간의 핵전쟁 확률이 가장 높았던 기간이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D데이-13'에 극적으로 묘사된 적이 있는 당시 상황은 영화보다 더 전율을 느낄 정도로 긴박했다.

그런 만큼 미국과 소련의 수뇌부가 펼친 기대결과 수싸움은 아직도 학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의 매력적인 연구대상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은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에서도 미국과 북한은 여기서 교훈을 얻어 봄직하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소련 최고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던진 마지막 수는 '트롤로프의 수'로 불리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소설가인 앤서니 트롤로프(1815∼1882)의 작품에 짝사랑으로 인해 마음이 달뜬 아가씨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청혼하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연상해 학자들이 붙여준 훈장이나 다름없다.

케네디가 소련이 내놓을 카드에 대해 지나치게 넘겨짚기를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긴 하다. 불과 1년 전에 있었던 피그스만 사건의 실패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으로서나 세계 인류를 위해서도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해득실을 따지고 보면 '트롤로프의 수'에는 협박과 양보가 동시에 담겼으나 협상과 게임의 자세가 읽혀진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기대결을 펼쳤지만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케네디의 머릿속에는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상대인 소련측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던 것 같다.

흐루시초프 역시 케네디가 지불하려는 것보다 적게 받을 준비가 돼 있었다. 자신이 최강수를 둘 경우 흐루시초프가 서베를린을 침공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케네디는 나토 회원국가들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터키의 미사일 철수까지 양보하기로 제안서에 담았다. 그렇지만 흐루시초프는 그런 제안을 알기도 전에 쿠바 불가침 약속만으로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덜컥 결정했다. 흐루시초프는 최고간부회의 특별회의에서 "세계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후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케네디가 확률이 3분의 1과 절반 사이라고 말했던 핵전쟁은 그렇게 해서 막이 오르지도 않았다.

소련 대신 상대가 바뀌었고 이젠 긴장감도 한층 줄어들었지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게임에서도 미국은 케네디의 심정을 되새겨보는 게 좋을 듯하다. 협상과 게임에서는 그 나름의 법칙이 있게 마련이나 북한의 요구보다 조금만 더 내줄 수 있다는 각오가 돼 있다면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 까닭이 없다.

최대 현안인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권만 해도 북한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풀어나가는 방법은 그리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미 제시해 놓은 훈수도 적지 않다.

벼랑 끝을 즐겨 찾는 북한에도 '트롤로프의 수'는 유효하다. 때마침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에 던진 충고는 더 없이 적절하다. "북한은 100% 포식하려 들지 말고 80% 정도의 포만감에 만족해야 한다." 케네디가 대쿠바 정책에서 추구한 '저소득-저위험 정책'은 언뜻 보면 불만스러운 수지타산 같지만 북한으로서는 다른 곳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과 북한 모두에 '트롤로프의 수'가 절실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흔히 게임으로 불릴 때가 많은 외교는 어느 학자가 지적했듯이 과학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베이징에서 속개된 4차 6자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이 공동발표문 작성에 합의하지 못하면 상황은 훨씬 어려워질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시간이 늘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대표단이 할 일도 '트롤로프의 수'를 찾아내 북.미 양측에 전하는 것이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