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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김학순 칼럼>회색도 때론 정답이 된다

2005-11-23
남북한관계에서는 모호성이 늘 말썽을 빚곤 한다. 북한 인권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지난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 때 우리 정부가 기권한 것을 둘러싸고 날선 공방이 오가고 있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도 모호성투성이기는 마찬가지다. 경수로 제공 문제부터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논의에 이르기까지 애매한 수사학으로 점철돼 있다.

극단적인 비판자들은 '지뢰밭'이라고 일컫는다.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공급을 논의한다' '각자 정책에 따라 관계 정상화 조치들을 취한다'는 표현 등은 벌써부터 북한과 미국간에 첨예하게 이견을 보이거나 갈등의 소지가 충분하다.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논의한다'는 조항은 양날의 칼과 같다. '한.미 동맹 철폐'와 '주한미군 철수'라는 주장이 돌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9.19 공동성명은 이른바 '창조적 모호성'이 없었다면 도출되기 어려웠던 구조적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모호성은 남북관계의 큰 획을 그은 6.15 공동선언에 나타난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공동선언 2항은 발표 직후부터 끊임없는 논쟁 대상이다. 역사적인 통일조항이라는 평가에서부터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양극단을 넘나든다.

여러 갈래의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 조항은 그래도 불가피했다는 견해가 다수인 듯하다. 뜻깊은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뜨거운 감자를 애매하게라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나름대로 약효가 적지 않은 수단이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손꼽을 만한 사례로 흔히 미국의 대만정책을 든다. 최강대국 미국과 중국 간에 타협이 불가능한 현안 가운데 하나가 대만 문제다. 한반도 문제로 비약할지 모르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회자되곤 하니 남의 일만도 아니다. 미국은 겉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표방하지만 속내는 대만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도 미국의 이중성을 알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전략적 모호성은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이를 선택하는 것은 이분법적 접근보다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관계에서는 검은색이냐 흰색이냐, 강경책이냐 온건책이냐 하는 딱 부러지는 선택만이 정답은 아니다. 사안마다 얼마나 지혜로운 선택이냐가 잣대여야 한다.

정부의 북한 인권문제 정책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북한 인권문제는 짚고 넘어 가야 할 숙제임에 분명하다. 유엔총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 인권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북한 인권문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한결 세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인권결의안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연합이 주도한 것이어서 북한에 주는 부담은 더욱 크다. 결자해지가 아닌 반발로만 풀기 힘든 숙제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는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탄력적인 정책을 택한 불가피성이 도드라져 보인다.

사실 긴장과 협력이 교직된 남북관계는 그 자체가 이중적이거나 복합적이어서 전략적 모호성이 유효할 때가 많다. '통일된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동반자관계'이자 '정치.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이중적 상황이 지속되는 한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면 풀기 힘든 난제가 널려 있다. 그런 만큼 남북관계에서는 정답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물론 논란의 근저에는 대개 보편성이 우선이냐 특수성이 먼저냐가 똬리를 틀고 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될수록 전략적 모호성을 동원해야 바람직한 현안이 늘어날 확률이 높다. 게다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자리한 한반도의 국제정치적 환경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생존의 지혜가 우리에게 요긴할 때가 점차 잦아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런 전망도 모호성의 극치인 듯하다.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