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6-04-04 17:59:37
“제가 왜 소학교밖에 안 나왔습니까? 저도 대학을 나왔습니다.” 정회장이 섭섭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정회장께서 소학교만 졸업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대체 어느 대학을 나왔습니까?” “신문대학을 나왔지요.” “신문대학이라뇨?” 박대통령은 정회장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오자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정회장은 정색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소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신문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었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정치, 사회, 문화면은 물론이고 광고까지 다 읽었지요. 신문에는 문필가, 철학자, 경제학자, 종교학자 같은 유명인사들의 글이 매일 실리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다 나의 스승입니다. 아무리 명문대학을 나오면 뭘 합니까? 저만큼 신문 열심히 읽은 사람은 없을 테니 실력으로 따지자면 명문대학보다 신문대학 출신이 한 수 위지요.” 그러자 박대통령은 그만 화제를 돌려버렸다고 한다.
-소학교때부터 광고까지 읽어-
그의 신문 사랑은 또다른 곳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하고많은 동생들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는 신문기자였던 다섯째 정신영이었다. 정신영이 독일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정신영이 회원으로 있던 관훈클럽에 거금을 쾌척해 신영연구기금을 만든 것도 동생과 신문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었다.
신문을 대학에 비유한 것은 정주영뿐만 아니다. 미국의 헨리 워드 비처 목사는 플리머스 설교집에서 “신문은 일반 서민의 교수다”라고까지 했다. “런던 타임스 한 부는 투키디데스(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역사책 전체보다 더 유익한 지식을 담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는 영국 경제학자 리처드 코브던도 빼놓을 수 없다.
정회장이 ‘대학’으로 여겼던 신문은 위기를 맞은 지 오래다. 내일 모레면 다시 ‘신문의 날’을 맞는 한국의 신문 종사자들은 그래서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서재필 박사가 꼭 110년 전 독립신문을 창간한 1896년 4월7일을 기려 만든 ‘신문의 날’이지만 독자들의 외면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어지럼증을 느낀다.
우리나라 신문구독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에 속한다. 어느새 40%대 초반까지 내려가 있다. 신문을 보는 집이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 정보기술(IT)과 뉴미디어의 발전속도가 남들보다 빨라서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IT산업이 발달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신문구독률이 90%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일본 역시 이들 나라와 어깨를 겯는다.
일본은 고교생들의 독해력이 조금 떨어지자 충격을 받고 의회의원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 지난해 ‘문자활자문화진흥법’을 만들고 읽기문화증진운동을 거국적으로 펼치기에 이르렀다. 너무 자주 얄미운 짓을 하는 일본인들이지만 그런 안목은 부럽기 그지없다.
독자들의 신뢰를 잃은 일차적인 책임은 신문 종사자들이 떠안아야만 한다. 새로운 매체로 눈을 돌리는 젊은 독자층의 구미를 되찾아올 묘안도 찾아내야 한다. 누구의 잘못이든 신문업계는 이제 내부의 소모전 양상을 되짚어봐야 할 때이기도 하다. 하여 소비자에게 양질의 신문을 공급해야 할 책무를 지닌 고참기자로서 자괴감부터 잔뜩 든다.
-독자신뢰 되찾을 묘안 찾아야-
아쉬운 것은 일부 보수신문과의 악연을 이유로 참여정부가 신문의 위기를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듯한 자세다. 신문유통원을 비롯한 지원기관에도 정부가 온갖 눈치만 보고 있지 않은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굳이 신문이 아니더라도 읽는 문화의 토양을 함께 가꿔 나갔으면 싶다. 그리하여 넘쳐나는 감성보다 조금은 더 차분하게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 오죽 좋겠는가.
〈김학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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