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6-05-30 18:07:02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여전히 통한다고 인식되는 곳이 정치판이다. 적어도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오랫동안 그렇게 각인돼 왔다. 여기엔 선거야말로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는 비관주의가 바탕에 도도히 흐른다.
다른 한편으로 좋은 것의 적(敵)은 나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이라는 역설도 선거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흥미로운 현상의 하나도 이런 역설적인 적(敵)개념이다. 보다 적확하게 얘기하자면 인기있는 후보의 적은 더 인기있는 후보인 셈이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눌렀다는 시선도 맥락은 흡사하다.
이런 현상은 지방선거의 하이라이트인 서울시장 선거운동 과정에서 극명하게 표출됐다. 초기에는 한동안 여야를 통틀어 한나라당 맹형규 전 의원과 홍준표 의원 등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여겨졌다. 전략적으로 은인자중하던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가 선거전 참여를 결정하면서 분위기가 단박에 요동쳤다. 위기를 느낀 한나라당에서 오세훈 전 의원이 새로운 후보로 전격 등장하자 판세가 거꾸로 소용돌이치고만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검증된 후보의 승리’ 보장못해-
좋은 후보라고 선거에서 모두 이기는 것은 아니다. 대박을 터뜨리는 영화(映畵)나 책이 꼭 좋은 작품인 것만은 아닌 것과 같다. 선거는 반드시 훌륭한 후보가 이기는 게 아니라는 데 관전의 또다른 묘미가 있긴 하다. 불행의 싹도 물론 거기서 튼다.
선거판이야말로 유명무실(有名無實)과 명불허전(名不虛傳)이 교직되는 곳이다. 함량 미달인 후보가 포장을 그럴듯하게 해 당선되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고, 좋은 후보가 당을 잘못 선택해 비운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이런 선거 격언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할까. “가장 적게 공약한 사람에게 투표하라. 그가 가장 적게 실망시킬 것이다.”
“못난 당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고전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유세가 단발마적 자책감과 푸념만은 아닌 듯하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그제 고별사에서 겉포장이 화려한 사람을 선호하는 세태에 자괴감을 얹은 것 역시 유사한 염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진화론만 보더라도 꼭 더 좋은 것이 이기는 게 아니다.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는 게 생태계의 관건이다. 찰스 다윈이 남태평양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의 동물사회 연구결과에서 밝혀냈듯 생존경쟁에서 온존하는 것은 결코 크고 강한 종(種)이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종이라도 도태되고 만다. 경쟁에서 한번 이긴 쪽은 자신보다 더 나은 대적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개연성이 높다.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 또한 선거다.
이번 선거에선 일찌감치 특정정당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는가 하면 어떤 당은 선거가 끝나면 생명을 부지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마저 등장한다. 어김없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받는 것이긴 하지만 정치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 여부가 성패를 가른 셈이다.
사실 누가 더 나은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기에서의 승자는 속단하기 어렵다. 우연이나 운에 달려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늘 저녁 늦게쯤이면 얼추 드러날 이번 선거결과에서 우려되는 점은 단순히 민주주의의 근간인 견제와 균형의 차원을 넘어선다. 또다른 기둥인 다양성의 위기다. 그것은 특정정당의 우승열패와 상관없다. 정치에서도 다양성은 진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카를 지그문트의 지적처럼 모든 종류의 독점은 진화를 어렵게 만든다.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은 인류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획일적인 문화는 변화를 거부한다. 허용하더라도 더디기 그지 없다.
-‘특정정당 독식’ 다양성 위협-
조조(曹操)의 명략(明略)도 통하지 않은 선거 구도, 앵돌아진 유권자의 마음, 벌써부터 표정관리에 들어갔을 승자, 통한과 회오의 눈물로 얼룩질 패자, 심상찮은 정치권의 후폭풍 등등. 유권자들의 선택은 이미 대부분 결정돼 있겠지만 투표일 아침에 떠올려 보는 단상이 아무래도 그리 상쾌하지 않다.
〈김학순 논설실장〉
다른 한편으로 좋은 것의 적(敵)은 나쁜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이라는 역설도 선거전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흥미로운 현상의 하나도 이런 역설적인 적(敵)개념이다. 보다 적확하게 얘기하자면 인기있는 후보의 적은 더 인기있는 후보인 셈이다. 이미지가 이미지를 눌렀다는 시선도 맥락은 흡사하다.
이런 현상은 지방선거의 하이라이트인 서울시장 선거운동 과정에서 극명하게 표출됐다. 초기에는 한동안 여야를 통틀어 한나라당 맹형규 전 의원과 홍준표 의원 등이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여겨졌다. 전략적으로 은인자중하던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가 선거전 참여를 결정하면서 분위기가 단박에 요동쳤다. 위기를 느낀 한나라당에서 오세훈 전 의원이 새로운 후보로 전격 등장하자 판세가 거꾸로 소용돌이치고만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검증된 후보의 승리’ 보장못해-
좋은 후보라고 선거에서 모두 이기는 것은 아니다. 대박을 터뜨리는 영화(映畵)나 책이 꼭 좋은 작품인 것만은 아닌 것과 같다. 선거는 반드시 훌륭한 후보가 이기는 게 아니라는 데 관전의 또다른 묘미가 있긴 하다. 불행의 싹도 물론 거기서 튼다.
선거판이야말로 유명무실(有名無實)과 명불허전(名不虛傳)이 교직되는 곳이다. 함량 미달인 후보가 포장을 그럴듯하게 해 당선되는 경우가 흔하디 흔하고, 좋은 후보가 당을 잘못 선택해 비운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이런 선거 격언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통할까. “가장 적게 공약한 사람에게 투표하라. 그가 가장 적게 실망시킬 것이다.”
“못난 당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고전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유세가 단발마적 자책감과 푸념만은 아닌 듯하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그제 고별사에서 겉포장이 화려한 사람을 선호하는 세태에 자괴감을 얹은 것 역시 유사한 염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진화론만 보더라도 꼭 더 좋은 것이 이기는 게 아니다.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는 게 생태계의 관건이다. 찰스 다윈이 남태평양 갈라파고스 제도(諸島)의 동물사회 연구결과에서 밝혀냈듯 생존경쟁에서 온존하는 것은 결코 크고 강한 종(種)이 아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적응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종이라도 도태되고 만다. 경쟁에서 한번 이긴 쪽은 자신보다 더 나은 대적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개연성이 높다.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 또한 선거다.
이번 선거에선 일찌감치 특정정당이 ‘싹쓸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는가 하면 어떤 당은 선거가 끝나면 생명을 부지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관측마저 등장한다. 어김없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받는 것이긴 하지만 정치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 여부가 성패를 가른 셈이다.
사실 누가 더 나은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기에서의 승자는 속단하기 어렵다. 우연이나 운에 달려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늘 저녁 늦게쯤이면 얼추 드러날 이번 선거결과에서 우려되는 점은 단순히 민주주의의 근간인 견제와 균형의 차원을 넘어선다. 또다른 기둥인 다양성의 위기다. 그것은 특정정당의 우승열패와 상관없다. 정치에서도 다양성은 진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카를 지그문트의 지적처럼 모든 종류의 독점은 진화를 어렵게 만든다.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은 인류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획일적인 문화는 변화를 거부한다. 허용하더라도 더디기 그지 없다.
-‘특정정당 독식’ 다양성 위협-
조조(曹操)의 명략(明略)도 통하지 않은 선거 구도, 앵돌아진 유권자의 마음, 벌써부터 표정관리에 들어갔을 승자, 통한과 회오의 눈물로 얼룩질 패자, 심상찮은 정치권의 후폭풍 등등. 유권자들의 선택은 이미 대부분 결정돼 있겠지만 투표일 아침에 떠올려 보는 단상이 아무래도 그리 상쾌하지 않다.
〈김학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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