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침묵의 카르텔

입력 : 2008-05-23 18:11:37수정 : 2008-05-23 18:11:42

어떤 사나이가 남자로 위장하고 군에 입대한 여동생 자랑을 늘어놓았다. 한참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물었다. “그렇지만 사내 녀석들과 함께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샤워를 하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안 그래?”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이지.” “그런데 여자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한단 말이야?” “눈치는 채지만 그걸 입밖에 내려드는 녀석이 어디 있겠냐고?” ‘침묵의 카르텔’을 은유하는 외국의 우스개 한 토막이다.

‘침묵의 카르텔’은 특정 사회집단이나 이익단체에 불리한 문제가 생겼을 경우 같은 구성원들이 입을 다물거나 서로 비판하지 않는 일종의 담합현상이다.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덮어버려 ‘정의의 적’이 되는 사례가 흔한 게 ‘침묵의 카르텔’이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 반(反) 드레퓌스파가 행한 진실 은폐 기도처럼 단순한 ‘침묵의 카르텔’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침묵의 카르텔’이란 비판의 뭇매를 가장 많이 맞은 곳은 언론이었다. 여전히 일부 언론의 동업자 봐주기는 깨지지 않고 있긴 하지만 성역의 벽은 상당 수준 허물어졌다는 평가도 받는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언론계에선 동업자 상호 비판을 금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급속히 해체돼 가고 있으나 문단에선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꼬집은 적이 있다.

하긴 ‘침묵의 카르텔’은 이 단어가 탄생한 토양인 기업·경제계에 가장 심각하게 똬리를 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성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이나 문화·예술계, 종교계 할 것 없이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침묵의 카르텔’은 국제정치에서도 심각하다. 이해관계가 걸리면 불의를 보고도 모두들 눈을 감고 만다.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한나라당 내에서 ‘침묵의 카르텔’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소식은 우울한 민주주의의 단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청와대가 좌우하는 당 인사나 현안에 다른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권위주의 시절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는 현상은 정당의 건강성에 우려를 낳는다.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면 용기가 필요한 건 물론이다. 따돌림을 각오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도 혁신의 뇌관은 ‘침묵의 카르텔’을 깨야 열리기 시작하는 법이다.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내조  (0) 2008.06.06
[여적]‘시간이 해결책’  (0) 2008.05.30
[여적]법칙 속의 이명박  (1) 2008.05.16
[여적]사바의 연꽃  (2) 2008.05.09
[여적]석양 음악  (0) 2008.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