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5-30 18:09:49수정 : 2008-05-30 18:09:53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에는 ‘망각의 숲’이란 게 있다. 이곳엔 두 가지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망각의 숲’ 끝에 있는 고시원과 관련된 것이 하나다. 공력을 잔뜩 들여 공부를 마친 뒤 이 숲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그동안 기억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는 얘기다. 마치 죽은 이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반드시 건너야 한다는 망각의 강 ‘레테’에 비유된다. 다른 하나는 망각의 숲길을 함께 걷는 연인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다.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처음 구분한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뇌 용량이 평생 벌어지는 모든 일을 기억에 담아둘 정도로 크다고 생각했다. 실제 1970년대의 한 실험에서는 기억의 양적 한계를 측정하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다. 수만장의 사진을 장당 5초씩 두 번 보여준 뒤 보여준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을 구분하는 한 실험에서 평범한 실험대상자들은 손쉽게 사진들을 골라냈다고 한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불행하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각의 유령을 원망한다. 단기 기억의 망각 원인은 제한된 용량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한대 용량을 저장할 수 있는 장기 기억의 망각 원인은 다르다. 뇌 입력이 완료되기 전에 정보가 사라지거나 불확실한 상태에서 저장되는 경우도 기억 재생이 불가능하다.

확실히 저장된 기억정보가 망각되는 원인은 소멸설과 간섭설로 설명한다. 소멸설은 기억 정보를 쓰지 않고 내버려두면 자연스레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이론이다. 간섭설은 입력과정이나 저장돼 있는 동안 여러 정보들의 상호간섭으로 혼돈이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꼬일 대로 꼬인 난제를 만나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이솝의 말에 의존하고 싶은 경우도 흔하다. 여기엔 사람들의 망각 현상에 대한 기대심리도 내포돼 있다. 온갖 악재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 발표 이후 ‘지금은 시간이 해결책’이라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는 소식이다. 소나기는 피해 가고 구멍은 땜질로 막자는 생각인지 모르나, 문제의 뿌리를 캐내지 않으면 후유증은 끝내 치유되기 어려울 터이다. ‘문제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라고 설파한 부처의 고차원적 법언이라도 믿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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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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