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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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약 효과’(플라시보 효과)를 처음 발견한 프랑스의 약사이자 심리치료사 에밀 쿠에는 ‘상상력이 의지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냈다. 어떤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지력보다 상상력이 한층 더 긴요하다는 의미다. 의지력이 가장 큰 관건이라고 여기는 사회통념을 뛰어넘는 생각이다.

쿠에가 강조하는 ‘상상력의 힘’은 세 가지 법칙으로 요약된다. ‘의지와 상상력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상상력이 이긴다. 의지와 상상력이 같은 방향으로 발휘되면 그 에너지는 두 배가 아니라 몇 배로 늘어난다. 상상력은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영역이다.’ 쿠에는 상상력이 의지력을 이기는 대표적인 사례로 아무리 자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도 졸리지 않으면 즉시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든다. 자기암시를 통해 얼마든지 상상을 좌우할 수 있다는 세 번째 법칙에 주목한 것이다.

상상력이 의지보다 열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매일 일정 기간 동안 과녁 앞에 앉아서 다트를 던지는 상상을 하면 실제로 연습한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건 심리학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철저한 정신적인 예행연습과 상상력 훈련 방법을 통해 골프 실력을 향상시키고 있는 게 요즘의 실정이다.

9·11테러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상상력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는 9·11 사태가 네 가지 종류의 실패를 드러냈다고 본다. 상상력, 정책, 역량, 운영의 실패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실패는 상상력의 빈곤이었다.” 9·11 사태 직전까지 끊임없는 테러정보를 입수하고도 그럴 가능성에 대한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모든 정책의 시발점은 상상력이다.

‘유쾌한 미학자’란 애칭을 지닌 진중권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에서 21세기에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 힘’이라고 선포한다.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라는 명쾌한 메시지다. 상상력이 부드럽고 유연한 놀이정신에서 나온다는 시선이 책 전체를 관류한다. 미래에는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예언도 들어맞은 셈이다.

지은이는 상상력 혁명으로 맞이한 사유의 특징을 비선형성·순환성·파편성·중의성·동감각·상형문자·단자론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감흥 깊게 펼쳐나간다. 책의 내용과 구성도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주사위, 체스, 카드, 불꽃놀이, 마술, 만화경 등 예술 작품에 등장한 스무 가지 놀이가 상상력으로 뻗어가는 방법론을 탐색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책 자체가 하나의 놀이이자 놀이터다. 300여 컷에 달하는 그림에 감춰져 있는 크로스워드 퍼즐 같은 텍스트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상상력의 대표주자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는다. 500년 전 사람이었던 다빈치는 현대 비행기와 유사한 비행기의 설계도를 그렸다. 실질적인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비행기가 20세기 초에 나온 사실에 비춰보면 다빈치의 상상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저자는 다빈치를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으로 묘사한다. ‘상상력의 세계=어린아이의 세계’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해도 괜찮겠다.

그러고 보니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의 저자인 다자이너 임헌우가 일갈했던 말이 떠오른다. “앞으로의 문맹자는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사진작가 라즐로 모홀리 나기가 1920년대에 “미래의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했던 경구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다. 상상력의 빈곤은 세밑의 논란거리인 광화문 광장 디자인 같은 문화분야뿐만 아니다. 삽질 외에는 두드러지는 게 없어 보이는 정치, 행정, 사회정책 등속에서 숱하게 눈에 잡힌다.



Posted by 김학순

2009.12.0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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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미국 의회는 ‘실크로드 전략 법안’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소련 붕괴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과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적인 의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러시아·중국·이란 등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려는 목적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진보적인 민주당 출신이지만 주저없이 서명했음은 물론이다. 이 법안의 핵심은 중앙아시아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 하나바드 군사기지는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전초기지가 됐다.

이 법안과 관련된 미 의회보고서를 보면 훨씬 확연해진다. “100여년 전 중앙아시아는 차르 러시아, 식민주의 영국, 나폴레옹의 프랑스, 페르시아, 오토만 제국의 거대한 게임 판이었다. 100년 후 소련의 붕괴로 새로운 거대한 게임이 시작됐다. … 오늘날 이 거대한 게임의 이해관계에서 새로운 경쟁자는 미국이다.”

지난달 19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중국이 아프가니스탄의 구리광산 개발권 입찰 경쟁에 뛰어들면서 이곳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 지난날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연상시킨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시선이 곱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싸우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퍼붓는 동안 중국은 엄청난 양의 자원 확보라는 실익만 챙기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러시아는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 경찰을 보냈다. 러시아의 비민간인이 아프간 땅을 밟은 건 1979년 12월 침공했던 소련군이 무자헤딘의 무력 항쟁에 무릎을 꿇고 1989년 2월 완전 철수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는 서유럽 국가들, 일본·터키·이란 등이 하나같이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라시아’ 개념을 처음 도입한 지정학자 핼퍼드 맥킨더(1861~1947)는 유라시아의 패권 보유국이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은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체스판 위에서 러시아와 벌인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을 반영한 것이다.

영국 언론인 출신의 중앙아시아 전문가인 피터 홉커크의 역작 <그레이트 게임>(사계절)은 이 지역을 둘러싼 거대한 드라마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100년간에 걸쳐 벌인 외교·첩보전과 무력 충돌을 말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남진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인도 식민지를 지키려던 영국이 패권을 놓고 승부를 겨루었던 땅이다.

홉커크는 이 거대한 게임을 일반적인 역사쓰기에서 벗어나 긴장감과 박진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처럼 엮었다. 영국 정보 장교인 아서 코널리가 처음 사용했던 말인 ‘그레이트 게임’의 중심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19세기 내내 이어진 ‘그레이트 게임’은 20세기 초에 끝났지만,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고 붕괴하는 과정에서 게임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남쪽의 선수로는 영국 대신 미국이 자리했다. 일본 국제문제 저널리스트 다나카 사카이의 <탈레반과 아프가니스탄>(전략과문화)을 함께 읽으면 21세기판 ‘그레이트 게임’의 전황이 더욱 명쾌하게 정리된다. 1994년 탈레반 등장 전후부터 이어져온 미국과 탈레반, 알 카에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의 또 다른 ‘그레이트 게임’을 객관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늘 현재진행형의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가보다. 이 게임은 단순하게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아프간’이란 말에는 ‘힘들다’는 뜻이 담겨 있다니 ‘땅’을 의미하는 ‘스탄’과 합쳐져 이름만큼이나 기구하고 ‘힘든 땅’임에 틀림없다.



Posted by 김학순

2009.11.20 17:36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이해하라고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건 가장 사치스러운 충고이니까.” 전도연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의 절규는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아픔을 대신 짊어지긴 어렵다는 걸 실감나게 보여준다. 기독교의 회개와 용서를 다루고 있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나 이를 각색한 <밀양>은 모두 우리가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귀감이다.

2006년 10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니켈마인스라는 작은 시골마을의 아미쉬 원룸 스쿨에 우유배달원이 침입해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5명이 목숨을 잃고 5명은 중상을 입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환상에 빠진 한 감리교도가 저지른 이 사건에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피붙이를 잃은 유족과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보여준 의연한 대처였다. 이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현장에서 자살한 범인의 가족을 찾아 위로하며 용서의 뜻을 전했다. 범인의 장례식 조문객 가운데 절반이 아미쉬여서 미국 사회가 더욱 놀랐다. 더구나 당시 9·11 테러사건을 보복으로 응답한 부시 행정부의 대처와 사뭇 비교되는 바람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형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변호사 레이첼 킹이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샨티)에서는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나 미국 실화와 흡사한 전율을 받게 된다. 살인자를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에 앞장선 피해 유가족 10인의 감동적인 실화를 담고 있어서다. 보복과 증오 대신 용서와 사랑을 택한 이들의 진솔하고 절절한 고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외경스럽다.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했다. 하나같이 살인범과 화해를 시도했고, 어떤 이는 살인범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도록 변호까지 자청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성자 아니면 정신병자로 여기지만 실제론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엄청난 용기와 신념을 지닌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은 “사형제도 역시 복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유엔인권협약에 조인했지만 비준하지 않았고, 서방사회에서 사형제도를 존속시키고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비판과 함께.

지능지수 68의 제인스 버나드 캠벨에게 사랑하는 딸 수잔을 잃은 목사 아버지는 “생사 결정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역설한다.

피자 배달원인 아들을 불량 청소년들의 총격으로 잃은 무슬림 아버지 아짐 카미사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들 이름의 재단을 설립해 청소년범죄 예방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해 청소년들을 교화해 이 활동에 참여시키는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가해자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들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게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용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형으로는 폭력을 이길 수 없다.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스도 이렇게 갈파했다.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면 용서는 가장 숭고한 복수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사형 폐지국인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하게 사형제 완전폐지를 통해 진정한 문명국의 대열에 합류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때마침 헌법재판관들이 사형제 폐지 헌법소원 결정을 앞두고 영화 <집행자>를 단체 관람할 예정이라는 풍문도 들려오니, 길조이려나.


Posted by 김학순

2009.11.06 17:35

2002년 마흔아홉 살로 세상을 떠난 외팔 서양화가 채희철은 신비스러운 일화를 남겼다. 그의 화실에는 온갖 화분들로 가득했다. 주로 남들이 버린 걸 지극정성으로 살려놓은 것이다. 그는 온종일 나무와 꽃들에게 자상한 말과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퇴근할 때는 작별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모두들, 잘 자라! 밤새 무럭무럭 자라거라.” 하지만 그가 숨진 지 얼마 후 화분의 식물들이 무단히 모두 죽어버렸다고 한다.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의 어떤 마을 사람들은 나무가 너무 커서 도끼로도 베기 어려울 때 모두 그 나무 곁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일제히 나무를 올려다보며 힘껏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한 달 동안 소리를 지르면 신기하게도 나무는 기력을 잃어 쓰러진다고 한다. 고함소리가 나무의 영혼을 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식물도 바흐의 아름다운 오르간 음악을 가장 좋아하고, 자동차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때로는 자살충동까지 느낀다는 숲생태학자 차윤정 박사의 말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일본 나고야에서 있었던 실화도 이채롭다. 외딴집에 살던 한 여성이 괴한에게 목숨을 잃었다. 목격자라곤 방에 있던 선인장뿐이었다. 범인에 대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었다. 고심하던 경찰은 언젠가 들었던 거짓말 탐지기를 선인장에 연결하는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유력한 용의자가 들어오자 거짓말 탐지기의 바늘이 심하게 움직였다. 몇 번이나 반복 실시해도 그 용의자만 들어오면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수사관은 끈질긴 추궁 끝에 자백을 받아내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일본 면역전문가의 실험 이야기를 들으면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린다. 선인장 1만개를 두 그룹으로 나눠 거짓말 탐지기에 연결했다. 한 쪽은 사랑스럽고 좋은 말을, 다른 한쪽은 욕과 협박조의 나쁜 말을 1년간 계속했다. 그 결과 긍정적인 말을 들은 쪽은 싱싱하게 자라서 꽃을 피운 반면 비방과 욕을 들은 쪽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시들어 거의 죽어버렸다고 한다.

‘나무 통역사’로 불리는 미국 식물심리학자 레슬리 카바가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목소리>(눈과마음)에서 식물도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카바가는 나무들의 목소리야말로 그 어떤 수행자의 말보다 자혜롭고 어떤 시보다 향기로우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한 자리에 서서 스쳐가는 바람을 소리 없이 감지하고, 지나가는 새와 짐승만을 보며 한평생 보내야 하는 식물들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 그리 대수롭겠느냐고 하겠지만 지은이는 식물들이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말들이 무수히 많다는 걸 보여준다.

‘식물의 아버지’라 불린 식물육종가 루터 버뱅크가 남긴 ‘일주일 안에 식물과 이야기하는 법’을 연상케 한다. 식물의 이름을 지어주고, 이미지 훈련을 통해 식물과 일체화를 시도하며, 애정을 듬뿍 담아 지며리 칭찬하면 반드시 반응이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식물들에게도 사랑과 고독, 슬픔과 욕망, 관계와 죽음을 의식한다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전한다. 초감각적인 지각을 지니고 있어 특정인과 유대관계를 깊이 맺게 되면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식물들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보여준다. 친구 대하듯 다정다감한 마음을 전하면 감응이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렷다. 다소 비약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찰스 영국 왕세자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식물과의 대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는 심정을 이해할 듯싶다.

추색이 완연한 요즘 야외로 나가 나무와 풀 옆을 지나가다 보면 그리움이 갈급한 영혼처럼 말이라도 걸려는 것 같지 않은가. 소통수단과 공간이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해 소통 부재, 소통 결핍을 하소연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무슨 역설인가. 하찮게 여기는 식물조차도 더불어 사는 삶과 진지한 대화를 즐기려는 데 말이다.


Posted by 김학순

2009.10.23 16:58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명저 <강대국의 흥망>에서 “한 나라가 세계무대에서 한 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할 때에는 경제력, 군사력의 성장과 더불어 반드시 문화의 융성이 이루어졌다”고 갈파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생전에 ‘아름다운 문화국가’를 그토록 희구했던 것도 기실 이 같은 연유일 게 분명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9일 라디오 연설에서 “내가 꿈꾸는 선진일류국가도 경제적 수준에 걸맞은 문화수준을 가진 문화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한 것은 ‘문화의 달’을 맞아 격조 있는 지도자로서의 위상 제고를 겨냥한 듯하다. 이명박 정부는 심지어 반대 여론이 거센 4대강 살리기도 ‘문화국가’와 연결고리를 짓는다. 화면을 장식하는 홍보영상은 “2011년 활기찬 문화국가로 변모합니다… 자주 침수되지 않는 상단 부분은 높게 성토하여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되어 지역의 문화행사와 이벤트 무대로 제공됩니다”라고 설득한다. 토건국가가 아니라 문화국가임을 부각하는 화장술도 비교급 차원을 넘어선 최상급 수준이다.

문화국가라는 용어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국가는 문화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면서 건전한 문화육성과 실질적인 문화향유권 실현의 책임을 다하는 국가로 요약된다. 문화국가 개념 정립의 선구자인 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문화국가의 개념적 요소로 국가로부터 문화의 자유, 문화에 대한 국가의 기여, 국가의 문화형성력, 문화의 국가형성력, 문화적 산물로서의 국가 등 다섯 가지를 든다.

마르크 퓌마롤리 프랑스문학사학회장은 <문화국가>(경성대출판부)에서 문화에 관료주의가 스미는 순간 창조력은 고갈된다고 경고한다. 문화의 생산과 유통을 지도하려 들고, 그 지도력을 당연한 선결 임무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파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퓌마롤리는 초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작가 앙드레 말로 이후의 프랑스 문화정책에 대한 찬양일색인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의 자발성과 예술의 전복성을 제도화하는 문화정책의 위험성을 비판한다. 그는 프랑스 문화의 고품격과 방대함을 은연중 자랑하지만 국가나 정부 주도로 추진되는 문화정책과 문화국가의 정체성에 우려를 나타낸다.

프랑스는 1959년 정부에 문화부를 갖춘 세계 최초의 민주국가다. 앙드레 말로는 기발하고 혁신적인 정책을 도입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 건축비의 1% 이상을 문화적 용도에 써야 한다고 규정한 ‘1퍼센트법’과 지방 문화원 격인 ‘문화의 집’을 전국적으로 건립한 것도 그의 상상력에서 나왔다. 이런 정책들은 한국을 비롯해 수많은 나라들이 복사품을 내놓을 정도로 반향이 컸다.

퓌마롤리는 앙드레 말로의 권위 아래 확립된 문화촉진현상을 진정 새로운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문화국가’ 프랑스에서 정부가 시장의 규율, 한계, 투명성 등을 확립해야 하는 책무를 망각하고 외려 혼란을 초래했다고 꼬집는다. ‘문화국가론’의 권위자인 김수갑 충북대 교수의 말처럼 국가가 문화적 경향에 대한 일방적 지원이나 배제 등 특정한 방향으로 문화의 발전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채찍이기도 하다.

취임 일성으로 ‘품격 있는 문화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유인촌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화계 인사들의 물갈이를 통해 문화 좌표의 일방적인 우향우를 꾀하고 있다.

최근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들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잇달아 추방하는 것을 정권에 대한 충성으로 여기는 풍토도 문화의 다양성을 뜨악하게 보는 ‘뒤틀린 문화국가’의 속성이다. 문화 관료로 변신했던 좌파 지식인 앙드레 말로는 반대 코드인 우파 드골 정권의 나팔수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기품 있는 문화의 대중적 확산’이라는 사명감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Posted by 김학순

2009.10.09 17:41  

영상의 힘이 탁월한 복제능력이라면 문자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이다. 문자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언급은 이를 잘 뒷받침한다. “인류는 공간 활동에서는 바퀴, 정신 활동에서는 문자라는 두 가지 발명에 의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글이 서양 알파벳을 비롯한 다른 문자를 능가한다는 사실은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이견이 없다. <총·균·쇠> <제3의 침팬지>의 저자인 퓰리처상 수상 진화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배합 등 효율성에서 각별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라고 격찬한다.

독일 함부르크대 베르너 삿세 교수는 “서양이 20세기에 비로소 완성한 음운이론을 세종대왕은 5세기나 앞서 체계화했다. 한글은 전통 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된 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칭송했다.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은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작품 <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글은 24개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문자체계지만 자·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음성도 표기할 수 있다”고 호평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영국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맨은 <세계를 바꾼 알파벳>이란 책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모든 언어학자로부터 고전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한글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라고 찬탄했다. 몇 년 전 작고한 세계적인 언어학자 제임스 매콜리 시카고대 교수는 해마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해 수업 대신 동료 언어학자, 학생, 친지들을 초대해 한국 음식을 차려놓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기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상찬은 의례적인 게 결코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과학성, 합리성, 독창성, 편이성 등을 기준으로 세계 모든 문자의 순위를 매겨 진열해 놓은 적이 있다. 이 때 1위는 단연 한글이었다.

최경봉 원광대 교수 등 국어학자 3명이 함께 쓴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함께)은 이처럼 높이 평가받는 우리글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인 대중서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까닭, 창제 직후 한글 보급에 얽힌 뒷얘기, 한글의 수난사 등 우리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는 29가지 한글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글 창제와 보급 과정에 참여한 학자들뿐만 아니라 훗날 문종이 된 세종의 세자, 정의공주의 협력설 같은 비화도 자세하게 들려준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이지만 독실한 불교신자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세종의 애틋한 심정을 헤아려 아들 수양대군이 훈민정음으로 <석보상절>을 지었다는 사실도 흥미롭게 밝혀준다. 조선시대 한글 보급의 일등공신은 소설이란 점도 이채롭다. 영화 <음란서생>을 떠올리는 채수의 소설 <설공찬전> 필화사건에 얽힌 일화 역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돋보이는 것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 점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 만들어진 몽골의 파스파 문자가 한글의 운영방식에 미친 영향도 애국심과 거리를 두고 분석했다. 한글과 비슷한 인도 구자라트 문자, 일본 신대문자(神代文字),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고대 문자 ‘가림토’의 신빙성도 정밀하게 검증한다.

한글에 얽힌 사연들을 미주알고주알 알고 나면 정체불명의 한글 오용을 밥 먹듯이 하는 습속을 되돌아볼 게 자명하다.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자신들의 문자로 채택한 이유도 한결 선명하게 느낄 게다. 영어에 목을 매다시피 하는 우리는 차기 독일 외무장관으로 확실시되는 귀도 베스터벨레 자민당 대표가 독일에서 열리는 공식행사에서는 영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뜻도 가슴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김학순

 
선물의 유래가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부족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귀한 소금을 둘러싸고 부족 간의 약탈과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물물교환이 이뤄졌던 것이 선물의 시초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남아도는 가죽과 소금의 물물 교환이 인심과 실리를 동시에 얻는, 세련된 방식인 선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선물의 기원이 원시시대에 남자가 식량으로 여자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도 있다. 호감을 사기 위해 주는 선물은 특정집단에서 자연스레 문화적 관습이 됐다고 한다.

선물 문화는 아프리카 갈로족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전해온다. 갈로족은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농사를 지었지만 빈부격차를 막을 수 없어 3년에 한 번씩 명절 때 곡식을 나눴다. 토질, 날씨, 농부의 정성에 따라 개인의 수확량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한해 농사가 끝나면 가족 식량을 제외한 나머지 곡식을 자루에 담아 마을 공동창고로 가져간다. 3년이 지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이면 추장은 타로이(선물)를 선포하며 창고 문을 활짝 연다. 곡식이 부족한 주민들은 이때 필요한 양만큼 가져간다. 부자라도 곡식을 남기지 않으므로 이듬해에도 당연히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흉작이 게으름에 대한 신의 경고라고 여긴다.

이와 비슷한 문화는 북미 태평양 연안 인디언들과 남태평양의 일부 원주민들에게서도 엿보인다. ‘포틀래치’와 ‘쿨라’가 그것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대표작 <증여론>(한길사)에서 선물 교환의 가장 단순한 형식을 북미 원주민의 ‘포틀래치’에서 찾아낸다. 치누크 인디언 용어인 포틀래치는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는 뜻이다. 모스는 인류의 원초적 거래방식이 사회적 통념인 ‘물물교환’이 아니라 ‘선물주기’라고 주장한다. 이때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

모든 선물에는 언제나 세 가지 의무가 존재한다. 선물을 줘야 할 의무, 주는 선물을 받아야 할 의무, 받은 선물에 답례할 의무가 그것이다. 주는 것을 거부하거나, 초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결연이나 교제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진다. 집단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포틀래치에는 보편적 특징이 있다. 손님 초대와 연설할 때 선물을 받을 사람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선물의 크기는 주는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영한다.

포틀래치는 생산력이 불균등한 종족 사이의 부의 생산과 분배를 재조정해주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모스는 선물이 주는 사람의 우월성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포틀래치를 열지 못하고 선물을 받기만 하는 것은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레 위계가 형성된다.

멜라네시아 남동부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주민들이 행하는 선물교환제도인 ‘쿨라’는 ‘갑’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그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웃인 ‘을’에게 선물을 하고, ‘을’은 ‘병’에게 선물을 주는 방식이다. 결국 ‘갑’에게도 선물이 돌아간다. 이 같은 선물 체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의무적인 호혜성을 지닌 선물 교류는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선물과 교환이 인류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관찰한 모스의 <증여론>은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의 아버지’ 에밀 뒤르켐이 외삼촌인 모스는 구조주의의 선구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가슴을 울리게 만든 존재이기도 하다.

추석을 앞두고 선물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증여론>에 담긴 모스의 혜안이 드러난다.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선물은 신도 설득할 수 있다”고 했지만 “거저 받은 선물만큼 비싼 것은 없다”고 한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말을 더 명심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까 싶다.



Posted by 김학순

 2009.09.11 17:15

르포작가 하야사카 다카시가 엮은 일본 유머집 <조크 재패니즘을 논하다>의 한 토막이다. 호화 여객선이 항해 도중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기 시작했다. 선장은 남자 승객들에게 어서 빨리 배에서 탈출해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독려했다. 선장은 각기 다른 국적의 승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뛰어내리기만 하면 당신은 영웅입니다.” (영국인)“뛰어내리기만 하면 당신은 신사입니다.” (독일인)“이럴 때는 뛰어내리는 것이 이 배의 규칙입니다.” (이탈리아인)“뛰어내리면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요.” (프랑스인)“뛰어내리지 마세요.” (일본인)“다른 사람들도 다 뛰어내리고 있어요.”


일본의 집단주의적 국민성을 표징하는 풍자다. ‘빨간 신호등도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려울 것 없다’고 했던 한 일본 개그맨의 희화적인 대사와도 상통한다.

54년 만의 일본 정권 교체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특질이 변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전망까지 낳았다. 일본의 정치지형 변화는 전후 일본 지성을 이끌어온 행동파 지식인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를 추억하게 한다. 일본 정치사상사에서 큰 획을 그은 마루야마는 오랫동안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였다. 전후 일본 최고의 정치학자인 그의 학문적 업적 자체가 ‘마루야마 정치학’으로 불릴 정도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마루야마가 일본의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 준 석학이라고 숭앙한다. 마루야마는 일찍이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천황제에 과감하게 칼을 들이댔던 용기 있는 학자다. 그 자신이 ‘천황제’를 비판한 터에 ‘학계의 천황’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그의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의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인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은 일본의 내셔널리즘, 파시즘, 군국주의에 대한 치밀한 분석·비판과 함께 정치권력과 도덕, 인간과 정치, 지배와 복종 같은 보편적인 정치학 주제들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의 하나로 꼽은 것만 봐도 알만하다.

그는 일본 파시즘을 서구 전체주의와 구분해 ‘초국가주의’로 명명하고선 국가 전체가 하나의 ‘학교’가 돼 국민들에게 복장검사와 의식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특질을 지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의 고백은 사뭇 비장하다. “패전 후 반년에 걸친 고뇌 끝에 나는 천황제가 일본인의 자유로운 인격형성-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여, 그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는 인간유형의 형성-에 치명적인 장애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귀결에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이긴 쪽이 좋다는 이데올로기가 정의는 이긴다는 이데올로기와 미묘하게 교착되어 있는 점에 일본의 국가주의 논리의 특질이 드러난다.”

지배계층과 권력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다. “메피스토펠레스와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악을 행한 것이 일본의 지배 권력이었다.” “전직 총리, 각료, 고위 외교관, 육군 장군, 해군 제독, 궁내 대신들로 구성된 25명의 (전쟁)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다.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한다. 이것만큼 동서양의 전범자들이 법정에서 취하는 태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도쿄 재판의 피고나 많은 증인들의 답변은 하나같이 뱀장어처럼 미끈하면서 안개처럼 애매하다.”

그는 역사를 ‘자유의 의식을 향한 진보’라고 규정한다.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일본 근대의 질을 따져 묻고 진정한 민주사회 확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던 마루야마는 하늘나라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아마 “아직 갈 길이 멀다”가 아닐까 싶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으로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생활정치’ 구호의 난무 속에서 일본 정치의 보수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Posted by 김학순

2009.08.28 17:29  

정제되고 간결한 글이지만 격조 있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어 옷깃을 여미고 곱씹게 만든다. 때론 그윽한 수묵담채화를 떠올리는 영상이 문장 속에 농축돼 있다. 더러운 곳에 처하더라도 항상 깨끗한 마음을 지닌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경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정취, 세심한 관찰력에서 현현하는 사물의 참 뜻, 개인의 기호와 독서 취미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소재의 폭은 실로 다양하다. 도덕적 설교나 계몽의 의지 없이 한가로운 풍경과 즐거운 만필(漫筆)이 곁들여져 대중과도 친숙할지언정 거리감이 없다. 청언(淸言), 잠언(箴言), 경언(警言), 철언(哲言), 운언(韻言)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 육소형(陸紹珩)의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 여곤(呂坤)의 <신음어(呻吟語)>, 조선 후기의 문인 이덕무(李德懋)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와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같은 청언소품집((淸言小品集)의 공통점이다. 조선 정조가 정통 고문을 어지럽히는 잡문이라 해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감행한 바로 그 문제의 소품문들이다.

청언소품집 가운데 린위탕(林語堂)이 최고의 찬사를 바친 책이 청조말 문장가 장조(張潮)의 <유몽영(幽夢影)>이다. 린위탕은 <유몽영>에 매료돼 유명한 <생활의 발견>에 이렇게 썼다. “자연은 인생 전체 속으로 들어온다. 자연은 때로는 소리일 수도 있고 색깔이기도 하며 모양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다. 또 분위기일 수도 있다. 영민한 생활 예술가인 인간은 자연의 적당한 감정을 골라 그것을 자신의 기분으로 조화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중국 대부분의 시인 문인의 태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표현은 장조의 <유몽영>속의 에피그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저서는 문학적 격언을 모아놓은 책으로 이런 유의 격언집은 중국에 많이 있으나 장조에 비견되는 것은 결코 없다.”

‘희미한 꿈 그림자’쯤으로 번역할 수 있는 <유몽영>은 도가풍의 은일과 여유가 물씬 풍겨난다. 철인, 달인, 기인, 고인(高人), 운인(韻人) 등 여러 얼굴로 비치는 장조의 시적 언어구사와 차원 높은 은유가 빼어나다.

그 <유몽영>과 역시 청조말의 주석수(朱錫綏)가 쓴 <유몽속영((幽夢續影)>을 함께 묶어 정민 한양대 교수가가 맛깔스럽게 옮기고 평설을 곁들인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은 어디를 들춰봐도 지은이의 청신한 인격에서 나오는 아취와 촌철살인이 번뜩인다. <유몽영>은 서양식으로 보자자면 어떤 글은 에피그램이지만 또 다른 글은 아포리즘에 맞는 것도 있다. 프랑스적 인생탐구서와 비교되지만 일종의 처세서에 가까운 <채근담>과도 차별성이 우러나온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몇 대목만 맛보자. “매화는 사람을 고상하게 하고, 난초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며, 국화는 사람을 소박하게 하고, 연꽃은 사람을 담백하게 한다. 봄 해당화는 사람을 요염하게 하고, 모란은 사람을 호방하게 하며, 파초와 대나무는 사람을 운치 있게 하고, 가을 해당화는 사람을 어여쁘게 한다. 소나무는 사람을 빼어나게 하고, 오동은 사람을 해맑게 하며, 버들은 사람에게 느낌을 갖게끔 한다.” “자기 단속은 가을기운을 띠어야 마땅하고. 처세는 봄기운을 띠어야 마땅하다.” “젊은 시절의 독서는 문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뜰 가운데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구경하는 것과 같다. 모두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에 따라 얻는 바도 얕고 깊게 될 뿐이다.”

지은이의 문장은 여백을 두고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천천히 읽어야 분석이 되고, 게으르게 읽어야 상상이 되며, 느긋하게 읽어야 비판할 거리가 보이는 법이라고 설파한 ‘독서의 달인’ 호모 부커스의 자세가 이 책에 썩 잘 어울린다.


Posted by 김학순

2009.08.14 17:22  

라이벌은 ‘강물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라틴어 ‘리발리스’(rivalis)란 말에서 유래했다. 강물이 풍족하면 함께 나눠 쓰는 이웃이자 친구가 되지만, 부족하면 싸움을 벌이는 라이벌이 된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은 소유권을 정할 수 없는 강물을 놓고 늘 같이 쓰며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벌은 적과 다르다. 적은 타도와 섬멸의 대상이지만 라이벌은 대립하면서도 때로는 협력하는 공존공생의 대상이다. 라이벌은 불편한 존재이지만 성장 에너지이기도 하다. 라이벌이 없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갈망이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국 현대사에서 ‘세기의 라이벌’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을 보면 20세기 세계 미술계를 양분했던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의 관계와 많이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뭇 대조적인 민주화의 쌍두마차 YS와 DJ가 불꽃 튀는 경쟁자이면서 때로는 협력하며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쓴 지도자였듯이 마티스와 피카소 역시 서로 닮은 듯 다르게 치열한 경쟁을 벌인 거장들이어서다. 영남의 거두인 YS는 명문학교를 거쳐 전형적인 엘리트의 길을 걸은 반면 호남의 거목인 DJ는 상고를 졸업한 서민형 정치인이다. 성격적으로도 좀더 격정적인 YS와 진중한 DJ는 정치 스타일도 판이하다.

야수파로 불리는 마티스와 입체파로 일컬어지는 피카소는 이질적인 예술적 사조로 같은 시대를 풍미한 거장이다. 미국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잭 플램이 <세기의 우정과 경쟁-마티스와 피카소>(예경)에서 해부해 놓은 두 거장의 관계를 보노라면 대립쌍 같다. 색채와 형태에서부터 부르주아적 삶과 보헤미안적 삶, 낮 개미 체질과 밤 올빼미 체질, 냉정과 열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대비점은 끝 간 데를 모를 정도다. 절제된 언행의 ‘점잖은 교수님’ 같은 마티스와 ‘자유분방한 어릿광대’라고 자칭한 피카소. 각각 DJ, YS에 대입해도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마티스가 자제심이 강하고 신중한 태도로 유명한 반면 피카소는 극적인 기질과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이름이 높다. 마티스의 작품이 단순한 형상이지만 심원하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 데 비해 피카소의 그림은 직접적이고 서사적이다.

서로 유일한 경쟁자로 여긴 마티스와 피카소의 작품 세계는 완전히 다른 듯하면서도 닮은 꼴이다. 피카소는 특히 마티스의 작품 요소를 눈여겨봐 자신만의 화법으로 변용하길 즐겼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 견제하기 시작했지만 마치 서로의 페이스를 유지해 주는 마라토너 같았다고 플램은 증언한다. 두 거장의 작품들 간에 상호침투 흔적이 그만큼 뚜렷하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프리카에 매료됐던 마티스가 거리 골동품상에서 구한 콩고 조각을 들고 후원자 스타인가(家)를 방문하자 때마침 거길 와 있던 피카소가 아프리카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다.

“딱 한 사람만이 나를 평할 권리가 있으니 그건 피카소이다”라고 말했던 마티스나 “모든 것들을 두루 생각해 보니 오직 마티스밖에 없다”는 피카소의 말은 앙숙인 두 사람을 엿보게 한다. DJ가 야당 총재 시절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슬피 울 사람이 김영삼 총재이고, 김영삼 총재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피 울 사람이 이 김대중”이라고 했던 말을 연상한다.

이번주 초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병마와 투쟁을 벌이고 있는 DJ의 병실을 찾은 YS가 오랜 반목관계를 청산하는 화해의 말을 남겨 뒷담화가 무성하다. 아쉬운 것은 서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다. 하긴 피카소는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부고 전화조차 외면해버렸다고 한다. 영국 작가 오웬 펠담은 “가치 있는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화해하면 더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