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1 17:15

르포작가 하야사카 다카시가 엮은 일본 유머집 <조크 재패니즘을 논하다>의 한 토막이다. 호화 여객선이 항해 도중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기 시작했다. 선장은 남자 승객들에게 어서 빨리 배에서 탈출해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독려했다. 선장은 각기 다른 국적의 승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뛰어내리기만 하면 당신은 영웅입니다.” (영국인)“뛰어내리기만 하면 당신은 신사입니다.” (독일인)“이럴 때는 뛰어내리는 것이 이 배의 규칙입니다.” (이탈리아인)“뛰어내리면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요.” (프랑스인)“뛰어내리지 마세요.” (일본인)“다른 사람들도 다 뛰어내리고 있어요.”


일본의 집단주의적 국민성을 표징하는 풍자다. ‘빨간 신호등도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려울 것 없다’고 했던 한 일본 개그맨의 희화적인 대사와도 상통한다.

54년 만의 일본 정권 교체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특질이 변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섣부른 전망까지 낳았다. 일본의 정치지형 변화는 전후 일본 지성을 이끌어온 행동파 지식인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를 추억하게 한다. 일본 정치사상사에서 큰 획을 그은 마루야마는 오랫동안 진보적 지식인의 대명사였다. 전후 일본 최고의 정치학자인 그의 학문적 업적 자체가 ‘마루야마 정치학’으로 불릴 정도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마루야마가 일본의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 준 석학이라고 숭앙한다. 마루야마는 일찍이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천황제에 과감하게 칼을 들이댔던 용기 있는 학자다. 그 자신이 ‘천황제’를 비판한 터에 ‘학계의 천황’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그의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의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인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은 일본의 내셔널리즘, 파시즘, 군국주의에 대한 치밀한 분석·비판과 함께 정치권력과 도덕, 인간과 정치, 지배와 복종 같은 보편적인 정치학 주제들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뉴욕 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책 100권의 하나로 꼽은 것만 봐도 알만하다.

그는 일본 파시즘을 서구 전체주의와 구분해 ‘초국가주의’로 명명하고선 국가 전체가 하나의 ‘학교’가 돼 국민들에게 복장검사와 의식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특질을 지녔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의 고백은 사뭇 비장하다. “패전 후 반년에 걸친 고뇌 끝에 나는 천황제가 일본인의 자유로운 인격형성-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여, 그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는 인간유형의 형성-에 치명적인 장애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귀결에 드디어 도달한 것이다.” “이긴 쪽이 좋다는 이데올로기가 정의는 이긴다는 이데올로기와 미묘하게 교착되어 있는 점에 일본의 국가주의 논리의 특질이 드러난다.”

지배계층과 권력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다. “메피스토펠레스와 반대로 선을 원하면서도 언제나 악을 행한 것이 일본의 지배 권력이었다.” “전직 총리, 각료, 고위 외교관, 육군 장군, 해군 제독, 궁내 대신들로 구성된 25명의 (전쟁)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다.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한다. 이것만큼 동서양의 전범자들이 법정에서 취하는 태도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도쿄 재판의 피고나 많은 증인들의 답변은 하나같이 뱀장어처럼 미끈하면서 안개처럼 애매하다.”

그는 역사를 ‘자유의 의식을 향한 진보’라고 규정한다.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일본 근대의 질을 따져 묻고 진정한 민주사회 확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았던 마루야마는 하늘나라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아마 “아직 갈 길이 멀다”가 아닐까 싶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으로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생활정치’ 구호의 난무 속에서 일본 정치의 보수지형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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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