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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독립 250주년, 미국은 ‘언덕 위의 도시’인가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언덕 위의 도시’라는 말을 즐겨 쓴다. 존 F.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당선자 시절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모든 정부 기관)는 항상 ‘언덕 위의 도시’와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연설 때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고 자주 표현했다. 


 ‘언덕 위의 도시’라는 말은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롭이 먼저 썼다. 존 윈스롭은 1630년 영국에서 아메리카 대륙 뉴잉글랜드로 떠나는 아라벨라호 갑판에서 “저 건너 새로운 언덕 위에 세상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도시를 세우자”고 설교했다. ‘언덕 위의 도시’는 신약성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유래했다.


 ‘언덕 위의 도시’는 미국 예외주의의 은유어로 쓰인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차별성을 지닌 특별한 나라라는 의미다. 이 은유가 현대 정치 수사로 널리 쓰인 데에는 레이건의 영향이 크다. 레이건은 이 표현을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 도덕적 리더십의 본보기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확장했다. 다른 나라들은 이를 ‘미국 우월주의’로 해독하기도 한다.

                                                                                     

 
 그제(4일) 독립 250주년을 맞은 미국은 ‘언덕 위의 도시’와 거리가 멀어져가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주도 아래 독립 250주년 축하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으나 미국의 위상은 몰라보게 추락했다. 미국은 세계에 ‘희망의 등대’ 역할을 하기는커녕 힘과 거래가 우선하는 국제질서로 변질시켰다. 


 초강대국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80년 동안 나름대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규범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 기치 아래 국제기구와 규범의 형해화, 각자도생, 군비경쟁, 지정학적 불안정 심화가 돌올한 지구촌으로 표변시켰다.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였다. 세계 온실가스 배출국 2위인 미국의 파리 협정 탈퇴는 기후 위기가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인류 문명을 위협하는 처사다. 미국은 이뿐만 아니라 녹색기후기금,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등에서도 탈퇴했다. 트럼프는 기후위기를 ‘사기극’으로 매도한다. 미국은 유엔 산하 31개 기구를 포함해 모두 66개 국제기구·기관에서도 나오고 자금 지원을 끝냈다. 국제기구가 미국 이익에 반하고 비용을 낭비한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는 ‘국제법 따위는 필요 없다’는 태도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국제법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의 도덕성과 판단뿐이다.” 단독인터뷰에서 이 말을 들은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관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은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트럼프는 실제로 국제법과 타국의 주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나라 대통령도 무력으로 체포해 왔다. 미국은 올해 초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군사작전으로 붙잡아 미국 법정에 세웠다. 마약 밀반입, 테러, 조직범죄 같은 혐의가 표면적인 이유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엄청난 석유 자원이 탐나서’라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마두로 체포작전을 손쉽게 성공한 여세를 몰아 이란과 벌인 전쟁은 미국의 위상을 폭락시켰다. 미국이 오락가락한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 천문학적 전쟁 비용만 쓰고 체면을 구겼다는 평가가 나라 안팎에서 대세다. 원유 가격 폭등으로 전 세계 경제를 수렁에 빠트린 여파에는 트럼프가 전혀 개의치 않을 터다. 

                                                                                 

   
 트럼프는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손에 넣으려는 욕심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린란드가 희토류, 니켈, 코발트를 비롯해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재생에너지에 필요한 핵심광물이 대규모로 매장된 곳인 데다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보다 큰 캐나다를 51번째 주로 편입할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오랜 동맹국도 철저히 국익과 비용의 잣대로 평가하는 ‘거래적 관계’로 재편했다.


 미국이 도덕적으로 한층 타락했으며, 왕 같은 권위주의 대통령의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제도적 위기를 맞았다는 데 부정하는 미국인이 많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한 사람만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적 양극화는 심화일로에 있어 치유법을 찾기 어렵다. 미국 독립선언문 핵심 문구 3가지인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 가운데 어느 것도 더 나아지는 흐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 이젠 역이민 현상과 더불어 인재 유출마저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독립 250주년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국민이 많아 눈길을 끈다. 로이터와 입소스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 중 38%는 미국이 250년 뒤에도 단일 국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10명 가운데 6명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실패할 위험에 처했다고 본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인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했을 때 이미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는 끝났다”고 절망했다. 트럼프의 통상 정책과 국제 질서 파괴를 보고 나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는 학교 운동장의 불량배가 되었다”고 풍자한 언론인도 있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