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 사이에서 ‘서울병’이란 말이 유행한다. ‘서울에 대한 병적 동경’을 뜻하는 신조어다. 서울병은 흥미로운 언어유희적 현상의 하나다. 여행 후유증이 아니라 서울의 문화와 도시에 대한 동경심이 담겼다. 이 말은 최근 들어 중국 Z세대를 중심으로 소셜미디어 ‘더우인’ ‘샤오홍슈’ 같은 곳에서 빠르게 확산했다. 언론이 이를 ‘서울 신드롬’으로 번역해 소개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다.
서울병을 ‘국뽕’으로 소비해서는 안되겠지만 중국 언론도 인정할 만큼 실체는 분명하다. 중국 텐센트 뉴스는 “서울병은 2024년 등장해 원래 K팝 팬덤에서 한국 아이돌이 생활하거나 활동한 장소를 방문하고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됐으나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는 일본에서 유행했던 ‘파리증후군(Paris Syndrome)’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파리증후군은 파리 여행 후 기대치와 달라 실망감 탓에 겪는 정신적 질환을 뜻한다.
‘서울병’ 유행과 때를 같이해 중국인 단체관광객에 대한 무비자 입국이 한시적으로 허용됨에 따라 유커(중국인 관광객)이 대폭 증가했다. 한국의 무비자 입국 시행 이후 유커의 한국 단체여행 주문량이 357% 급증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한국 관광업계는 이번 조치로 내년 상반기까지 중국 관광객 100만여명이 더 방한할 것으로 예상한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듯 극우·보수성향 단체의 혐중(중국 혐오)시위가 끊이질 않아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최근 혐중시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서울 명동, 잠실, 양꼬치 거리(광진구), 종각 인근, 중국 교포들이 많이 사는 대림동 같은 곳에서 시위가 이어진다. 오랜 침체 끝에 겨우 상권이 살아나기 시작한 명동 상인들은 혐중시위 때문에 중국인 관광객이 끊길 수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혐중시위가 우려스러운 것은 행태가 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는 표현의 자유로 넘기기엔 지나치고 글로 옮기기 민망한 내용도 적지 않다. 혐오피켓을 관광객들 얼굴 가까이 갖다 대는 일도 있었다. 일본에서 논란이 된 혐한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시위자들은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만 저열한 혐중 선동에 불과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표현의 자유는 인종이나 국적을 이유로 모욕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지난 5월엔 유엔이 공식 보고서에서 혐중이 심각하다고 한국에 지적했다. 혐중시위자들은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도 편다.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태 배후에 중국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무비자 입국을 “간첩에게 면허증을 주는 일”이라고 극언했다. 이들이 비판하는 중국인 단체관광객 무비자 입국 정책은 국민의힘이 여당이던 지난 3월 20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발표한 조치다.
혐중시위 주도자들은 대개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단체 소속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 ‘윤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주장처럼 윤 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 보였던 ‘윤 어게인’ 구호도 그대로 등장한다. 윤 전 대통령은 “중국이 선거 부정에 연루된 주권침탈세력”이라는 우기기를 앞세워 12.3 불법계엄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런 가운데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중국 혐오를 입법으로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김은혜 원내정책수석부대표는 지난 주말 중국인의 의료·선거·부동산쇼핑 등을 겨냥한 이른바 ‘중국인 3대 쇼핑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부대표는 “중국인들은 제도의 빈틈을 파고들어서 혈세를 ‘먹튀’하는 사례가 멈추지 않는다”면서 “바로잡아야 할 국민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입법 근거조차 부풀리거나 사실과 맞지 않다. 김 부대표가 중국인의 건강보험료 과다혜택을 주장했지만 지난해 중국인의 건강보험 재정수지는 9369억원을 납부하고 9314억원을 받아 55억원의 흑자를 냈다고 한다. 서울 아파트 보유 외국인 가운데 미국인이 중국인보다 많고, 그 대부분은 실거주 목적이라고 한다. 또 외국인 투표권 문제가 상호주의에 어긋난다고 여기면 여야 협의를 거쳐 정비하면 되지 않나.
선동의 언어는 사실보다 힘이 세다. 정치인이 특정 외국인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일은 외교와 경제를 훼손하고 국격과도 거리가 멀다. 일본의 우익정당이 일본거주 외국인 혐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가 국제적 비난과 인권위원회의 제재를 받은 사례도 있다. 외국인 혐오를 공식 당론과 법으로 추진하면 한국이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로 비치기 쉽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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