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역사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비판정신을 담아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로마 권력층의 도덕적 타락과 부정부패를 나무랐다. 타키투스는 저서 ‘아그리콜라’에 ‘(로마인들은) 약탈 학살 강탈에 제국이라는 거짓이름을 붙이며, 폐허를 만들어 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라는 칼레도니아 족장 칼가쿠스의 연설문을 담았다. 오늘날 ‘그들은 사막을 만들어 놓고 그걸 평화라 부른다’라고 축약해 전해진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영토를 빼앗고 양민을 짓밟아 놓고선 ‘평화를 위해서’라고 내세운다. 푸틴은 침공 명분의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나치세력 제거를 들었다. 그것도 전쟁이 아니라 ‘특수군사작전’이라고 둘러댔다.
러시아군은 전쟁 개시 후 3년 반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았다. 최근까지 병원 학교 아파트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을 일삼았다. 심지어 어린이 병원을 목표로 삼아 대량학살을 저질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군사 목표물을 타격하는 군사작전이 아니라 문명파괴나 다름없는 만행을 쉴 새 없이 이어간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피해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하다. 온 나라가 포화를 맞고 폐허처럼 됐다. 전체 국토의 20%가량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민간인을 제외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사상자가 13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2025년 6월 초 보고서)
북극곰 같은 푸틴도 지쳤는지 전쟁을 끝내려 한다. 유리한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판단 때문이리라. 그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원한다는 속내를 노골화했다. 노벨평화상에 눈이 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알래스카에서 한 차례 담판도 벌였다. 아직 최종 결말에 이르지 못했지만 무고한 생명을 무더기로 도륙하고 남의 나라 땅을 빼앗은 침략자가 평화를 입에 올리는 건 가증스럽다.
피침략국 우크라이나는 직접 협상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있어 서럽다. 트럼프가 푸틴과 담판한 직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럽 중요국가 정상들을 백악관에 불러 모아 의견을 들었으나 제국주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럽도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만 확실히 된다면 영토 분할에 동의할 자세를 보인다.
휴전이나 종전은 우크라이나 영토 할양 방식으로 귀결될 개연성이 더욱 높아졌다. 트럼프와 푸틴의 알래스카 담판은 돈바스라는 우크라이나 알짜배기 땅을 러시아에 넘겨주는 문제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재침략을 막을 방법만 믿을만하면 울며겨자먹기일지라도 따를 듯하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두 차례나 뼈저린 배신을 경험했다.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와 민스크 협정이 그것이다. 1994년 우크라이나 영토에 배치된 구소련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핵과 평화의 교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름반도를 강제로 병합한 뒤 핵 포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러 반군 간의 종전을 위해 2014년과 2015년 체결한 민스크 협정 두 가지도 러시아의 침략으로 무용지물이 됐다.
이 때문에 유럽 군대의 배치와 미국의 철통같은 보장이 없으면 우크라이나로서는 어떤 합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안전보장의 명칭보다 실질적 내용이 중요하다. 나토 5조와 같은 실효성 있는 안보가 필요하다. 나토 5조는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전체 회원국이 공동대응하는 내용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에 몸담았던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의 경종이 옳다. 푸틴의 침략을 영토 이득으로 보상하면 폭력이 통한다는 신호를 전세계 독재자들에게 보내는 것과 다름없다. 발트 3국과 몰도바 같은 나라는 벌써 푸틴의 다음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독재자들과 직접 협상한 경험을 톺아보면 유화책은 그들의 식욕만 키울 뿐이라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한다. 미국이 러시아의 영토 강탈을 묵인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대만 침공을 허락하는 초대장을 보내는 것과 같다는 전문가들도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영토 약탈로 말미암아 무력으로 국경을 수정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약속인 유엔 원칙이 깨진다는 게 가장 안타깝다. 더구나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영토 확대 목적의 침략전쟁 금지라는 유엔헌장을 어겼기 때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크름반도 강제 합병이나 조지아 침공 때도 말로는 평화를 앞세웠다. 하지만 실제는 깡패 같은 태도를 드러냈을 뿐이다. 남의 나라를 사막으로 만들어 놓고 땅까지 빼앗은 뒤 그걸 평화라고 주장하는 지도자가 있는 지구촌을 문명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