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과열된 인공지능(AI) 패권경쟁이 ‘소버린 AI’를 추진하는 한국에 도전요인의 하나로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하순 발표한 ‘AI 행동계획’은 동맹국에 AI 기술과 인프라 도입을 촉진하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AI 모델, AI 반도체, 애플리케이션, 로봇, 기술표준에 이르는 AI 기술 종합세트(풀 스택)를 동맹국에 적극적으로 수출하겠다는 속셈으로 보인다.
그러자 사흘 뒤 중국은 ‘국제AI협력기구’ 설립을 제안하고 나섰다. AI가 소수 국가와 기업의 독점적 게임이 돼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리창 국무원 총리가 내놓은 주장이다. 중국이 글로벌 AI 거버넌스를 선도하겠다는 맞불이나 다름없다.
이재명정부가 추진 중인 ‘소버린 AI(Sovereign AI)’ 전략은 야심차다. AI 3대 강국이란 기치와 100조원 투자계획이 이를 말해준다. 정부가 ‘독자 AI파운데이션모델’ 프로젝트에 참여할 컨소시엄을 오늘(4일) 선정하면 첫발을 떼는 셈이다. 이 프로젝트는 글로벌 수준의 초거대언어모델(LLM)과 멀티모달모델(LMM)을 개발해 산업 전반의 AI 전환을 가속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소버린 AI는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인공지능 시스템을 의미한다. 소버린 AI가 중요한 이유는 기술적 독립성을 넘어선다. 데이터 주권은 소버린 AI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다. 소버린 AI는 국가안보와도 직결된다. 외부 의존도가 높으면 데이터 유출, 해킹, 스파이 활동 같은 위험이 증가한다.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버린 AI는 국가의 문화·사회적 특수성을 반영해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이와 함께 AI 기술의 핵심을 자국 내에서 개발하고 유지할 수 있어 경제적 독립성을 강화한다. 글로벌 빅테크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종속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주권을 지키는 데도 소버린 AI 시스템이 요긴하다. 소버린 AI는 비상상황에서 빠르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지난해 8월 발생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글로벌 먹통 사태는 ‘소버린 AI’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다.
회의론·신중론과 숙제도 많지만 ‘소버린 AI’가 한국엔 선택이 아닌 필수 국가전략이 됐다. 프랑스 ‘미스트랄’, 독일 ‘알레프 알파’, 싱가포르 ‘씨라이언’처럼 주요국에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소버린 AI’가 오픈AI나 구글 같은 초거대언어모델을 따라가긴 쉽지 않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다수 전문가가 제안하는 한국형 AI 전략에는 ‘피지컬 AI(Physical AI)’와 ‘버티컬 AI(Veritical AI)’가 들어간다. 피지컬 AI는 물리적 환경에서 작동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이어서 로봇 자율주행차 스마트공간 같은 자율 시스템에 적용된다. 정부가 추경 사업으로 피지컬 AI 분야에 상당한 예산을 배정한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버티컬 AI는 특정 산업이나 도메인에 특화된 인공지능이다. 전문지식을 활용해 특정 산업 고유의 규칙 패턴 업무흐름까지 이해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버티컬 AI의 대표적인 활용 분야는 의료 법률 금융 제조 물류 분야다.
국내에서만 활용되는 갈라파고스화를 걱정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갈라파고스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국형 AI를 잘 만들어도 우리끼리만 쓰면 영향력을 갖기 어렵다. K-팝 진화 과정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다른 과제도 만만치 않다. AI 개발에 필수적인 고급 인재가 부족하다. 데이터센터와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핵심 인프라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전기를 많이 쓰는 데이터센터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전력망을 개선하는 기반시설 구축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활용할 데이터도 부족하다. 소버린 AI 완성까지 갈 길이 멀다.
소버린 AI 추진 방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AI 전환(AX, AI Transformation)’에 대한 명확한 정책 부재 때문이다. AX는 기업이나 조직이 AI 기술을 기반으로 업무방식 제품 서비스 전반을 재편하는 것이다. 중소·중견기업들은 큰 비용과 불확실한 투자수익률 때문에 AX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자원 배분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100조원 투자에 AX 생태계 조성도 포함하면 낫다.
소버린 AI는 데이터와 고성능 하드웨어를 확보한다고 해도 쉬이 구현하기 어렵다. 기반 시설 투자, 인력 양성, 법과 제도 정비까지 국가 차원의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이 따라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