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진부한 광경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들의 재래시장 방문이다. 재래시장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으레 찾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대통령은 지지율이 추락하거나 국정이 꼬일 때면 재래시장을 찾아가곤 한다. 경제부처 장관들이 명절이나 연말연시를 앞두고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재래시장이기도 하다.
이때 옷차림에도 신경을 쓴다. 대개 검소해 보이는 점퍼에 운동화를 신는다. 어묵이나 떡볶이를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몇 가지 생활필수품을 사고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가기도 한다. 이따금 대형마트 때리기 쇼도 한다.
구태의연하다는 비판적 시선에도 재래시장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같이 서민과의 친화력을 과시하는 ‘서민 코스프레(서민 흉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총선을 앞두고 경기도의 한 재래시장을 찾았을 때였다. 족발이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겸손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게 서민 음식이에요.”
윤석열 대통령의 재래시장 정치는 유별나다. 지난주 부산의 대표 전통시장인 국제시장 일원(국제시장, 부평깡통시장) 방문 이벤트는 기어이 뒷말까지 낳았다.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가 참패로 끝난 뒤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기획한 행사가 재벌 총수 들러리 세우기라는 역풍을 불러왔다. 윤 대통령은 깡통시장 분식집에 들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재원 SK수석부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등과 더불어 떡볶이를 먹는 장면을 연출했다. 대통령과 재벌 총수들이 모여 재래시장에서 서민음식 떡볶이를 먹는 것은 기네스북에 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한 젊은 재벌 3세 기업인이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해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누리꾼들의 무성한 뒷공론이 단연 눈길을 끈다. 재벌 총수들을 병풍처럼 세우고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마치 총선거를 앞두고 이 지역 여당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쇼 같았다는 촌평도 나왔다.
윤 대통령의 재래시장 정치는 대구 서문시장 사랑에서 극치를 보인다. 그는 대통령선거 때와 취임 후 다섯 차례나 서문시장을 찾았다. 정치적 위기나 전환점에 봉착할 때마다 그랬다. 윤 대통령은 “권력이 서문시장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4월1일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 때는 “대구 시민의 땀과 눈물이 담긴 역사의 현장, 바로 이 서문시장에 우리의 헌법정신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거창하게 추켜세우기도 했다. 재래시장에 가서 이처럼 정치적 거대 담론을 들먹인 정치인은 없었다.
윤 대통령은 대선 출마 선언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시장에서 오뎅(어묵) 먹는 것 같은 쇼 정치는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게 고루한 이벤트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그 선언은 멀리 가지 못했다. 불과 한 달여 뒤부터 재래시장에 가서 어묵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가관인 것은 대통령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가 올해 초 단독으로 서문시장을 방문한 일이다. 대통령 부인이 서문시장을 혼자 찾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사실상 정치활동을 위해서였다. 당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기현 대표 후보에게 가 있는 ‘윤심’을 전하기 위해 대구를 방문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김 여사가 시장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는 가식적인 기사가 예외 없이 뒤따랐다.
서문시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보수의 심장’ ‘대구·경북(TK)의 정치적 성지’로 이미지화했다. 홍준표 대구시장, 유승민 전 의원을 비롯해 대구를 기반으로 삼은 정치인들이 이를 애용했다.
언제부턴가 재래시장 방문 정치는 여야와 유·무명 정치인을 가리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재래시장과 자신의 이미지를 겹치게 해 유권자들이 후보자와 같은 부류라고 믿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서민 상인들은 냉소적일 때가 더 많다. “우리에게는 그냥 어묵 먹고 간 손님.” “높은 사람들이 재래시장에 와서 장이나 봐 봤겠어.” “카메라 기자를 잔뜩 대동하고 와서 그림 하나 만들고 시장을 뜨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얄밉다.” 코미디 서바이벌 프로그램 ‘코미디 빅 리그’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왔다. 선거철마다 재래시장에 나타나는 정치인에게 하는 올바른 인사말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정답은? “꺼져!”다.
‘생각의 틀이 판박이인 이들에게서 구태정치 말고 뭘 기대할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민생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보다 서민을 위한다는 이미지 관리에 열을 올린다는 시각이 여전히 많아서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많이 다녀간들 시장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서민경제의 현장이지 정치판은 될 수 없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서문시장 방문 같은 아이디어를 낸 참모는 간신이기 때문에 잘라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멋진 그림도 지나치게 자주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운위된 지 오래인데도 수십 년 동안 변함없는 정치인들의 상상력 빈곤이 딱해 보인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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