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현실에서 반대로 일어나는 경우가 잦다. ‘역주행’ 꿈은 다르다. 일이 원하는 방향과는 반대로 진행되거나 운기(運氣)가 저하되는 현실로 나타난다.
출범 1년 6개월이 갓 지난 윤석열정부는 역주행이라는 비판을 유독 많이 받는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반짝인기 정책이 쏟아져 나온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려는 지구적인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회용품 금지 조치 철회가 느닷없이 불거졌다. 이게 자영업자 표를 의식한 선심성 정책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 편의점에서 비닐봉지 사용 등을 금지하는 정책은 애초 지난해 11월부터 하려다 1년 계도기간을 둔 뒤 정식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선진 대한민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9위를 자랑한다. 반대로 기후대응 순위는 탄소배출량의 90%를 차지하는 60개 나라 가운데 57위다. 달라진 국가 위상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은 F학점이라는 뜻이다. 한화진 환경부장관은 윤석열정부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친환경적이라는 궤변을 능청스레 늘어놓는다. 그동안 정부 말을 믿고 종이빨대 등 친환경 소비재를 생산하던 제조업체들만 날벼락을 맞았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정책은 내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2023년 대비 16.6%나 대폭 삭감한 일이다. 33년째 해마다 늘려오던 R&D 예산을 윤 대통령의 ‘과학계의 카르텔’ 비판 이후 뭉텅이로 잘라버려 대학을 포함한 과학계가 혼란과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불만과 비난이 빗발치자 대통령과 경제부총리가 필요한 부분을 증액하겠다고 달래기에 나섰지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상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충분한 검토없이 졸속으로 불쑥 결정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퇴행적인 예산삭감은 약자 지원에서 도드라진다. 그나마 많지 않은 약자 지원 예산을 싹둑 깎아버리면 위기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이 상담조차 받을 수 없는 사회로 전락하고 만다. 담당 부처가 윤석열정부가 홀대하는 여성가족부여서 더욱 의구심을 낳는다.
윤석열정부의 역주행은 지난 25일 창립 22돌을 맞은 국가인권위원회가 한층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들어온 부적절한 인사들의 전횡과 막말은 인권위의 존재 의의를 부끄럽게 한다. 안타깝게도 인권위원의 자격과 거리가 먼 인사들이 운영하는 위원회는 인권을 보호하기는커녕 외려 침해하는 기관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전격적인 공매도 금지 조치도 개인투자자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경제위기가 아닌데 정부가 공매도 전면 금지를 내놓은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공매도는 세계시장 표준"이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금융당국이 머쓱해졌다. 불가피한 조치라는 변명이 무색하게 장기적으로 한국 시장의 대외 신뢰 저하가 불가피하다. 2025년까지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국 지수 편입으로 금융시장이 도약하도록 하겠다는 30년 숙원 계획에 차질이 올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가균형발전과 지방소멸 방지에 역행하는 여당의 김포시 서울 편입 추진을 뒷받침하는 것도 문제다. 취약한 수도권 표심을 얻기에 급급한 국민의힘에 대해 소속 광역단체장마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정치쇼"라고 핀잔했다. 주무 부처 장관은 편입대상 지역의 재산(집)가치 증식을 지원 이유의 하나로 들었다. 기가 막힌다.
윤석열정부 1년 반은 민주주의가 역주행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윤 대통령이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권위주의적이라는 미국 지식인층의 따가운 시선이 있다.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행세(democracy posturing)’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언론정책 역행도 포함된다. 윤석열정부의 언론장악과 길들이기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지능적이고 악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론사·기자 압수수색, 취재·지원사업 배제, 부적절한 가짜뉴스 퇴치 정책, 대통령 관련 고소·고발 빈발 같은 사례가 무수히 꼽힌다.
윤석열정부 이념공세는 박정희정권 수준으로 퇴행했다는 지적받는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이다.” 대통령의 신호에 따라 정부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이달 말까지 철거하는 작업을 강행하기로 확정했다. 70대 노년층과 대구·경북지역만 일관되게 대통령을 지지하는 추세가 고착한 것에서도 현정부의 역주행이 입증된다.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어떻게 하면 노동시간을 늘릴까, 성평등을 뒤로 돌릴까 궁리하는 한국이 1960년대가 아니라 186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라고 꼬집는다. 야당도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고 있지 않느냐는 핑계를 대지만, 정부의 포퓰리즘이 내년 총선까지 줄줄이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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