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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문제는 정파적 온정주의다

 더불어민주당이 5년 만에 정권을 내준 것이 내로남불과 오만 무능 때문이었다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렵다. 조 국·윤미향 사태로 표징되는 ‘내로남불’은 온정주의와 정파·진영의 결합이 낳은 적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에 걸렸던 액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 조롱의 대상이 된 사례가 한두번이 아니다. ‘남에게는 부드럽게, 자신에겐 엄격하게’라는 뜻이지만, 문 전 대통령과 정권 사람들은 그 반대였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온정주의로 대했다.


 20대 여성인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단어가 ‘온정주의 타파’인 것도 이 때문이다. 최강욱 의원 성희롱 발언, 박완주 의원 성비위 사건, 김원이 의원 성폭력 2차가해 의혹 등 잇단 물의로 곤혹스러워하는 민주당이 뒤늦게 강경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서다. 온정주의는 애초 진보·개혁과는 상극이어야 한다.


 온정주의는 법과 원칙을 넘어 인정을 중시하는 문화다. 자연스레 법적인 권익보다는 인간적인 신의나 정에 얽매이기 쉽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정실주의 인사, 혈연·지연·학연 같은 특수관계에 바탕을 둔 연고주의,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부정부패는 온정주의 문화의 필연적 산물이다.

                                                               

   박근혜-최순실(최서원) 국정농단사건도 온정주의 문화가 불러온 재앙이었다.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에 얽매인 박 전 대통령의 40년에 걸친 온정주의가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을 외면했다.


 온정주의의 폐단과 역기능은 치명적이다. 무능한 아첨꾼이 유능한 인물을 제치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한다. 여기에 정파적 온정주의가 덧붙여지면 불을 보듯 뻔한 불의도 서로 덮어주면서 넘어간다. 온정주의는 악한 사람을 걸러내기보다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옹호하기 바빠 피해자들을 돌보지 않는다.


 온정주의가 정실주의와 결합하면 최악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을 만들어낸 조상의 지혜를 고마워해야 할까. 온정주의는 정치적 부패와 손잡기 쉽다. 정치적 생존에 신경을 곤두세울 뿐 정의를 외면하는 이유도 온정주의에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인사에서 도드라지는 문제점도 온정주의다. 윤 대통령은 나와 가까운 사람은 잘못과 흠결이 커 보여도 서슴없이 발탁해 쓴다. 내 사람은 허물이 있어도 괜찮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렸다.


 각종 논란으로 자진해서 사퇴한 김성회 종교다문화비서관 외에 다수의 비서관이 온정주의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물의를 일으킨 전력을 알고도 검찰 출신들을 핵심보직에 포진시켰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대통령실은 실력과 경륜을 강조한 인사라고 대변한다.

                                                                   

 윤재순 대통령실 총무비서관은 윤 대통령이 평검사 시절부터 수사관으로 함께 일했던 최측근이다. 총무비서관은 ‘대통령의 집사’로 불린다. 윤 비서관은 검찰수사관 시절 두차례나 성비위 사실이 적발돼 인사조처를 받았다. 2002년에 펴낸 시집 내용도 명백한 범죄인 지하철 성추행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의 담당 검사였던 이시원 공직기강비서관 임명 역시 온정주의의 산물이다. 이 비서관은 재판에 조작된 증거를 제출해 정직 1개월 징계를 받은 바 있다. 기록위조 사실의 인지 여부를 떠나 간첩 조작사건에 연루된 인물이 공직기강을 담당하는 비서관에 기용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인물을 앞세워 공직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앞서 지명돼 자녀 의대 편입학 특혜 의혹을 사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윤 대통령의 40년 지기라고 한다. 버티기 전술을 쓰는 정호영 후보자를 두고 보는 것도 온정주의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정파적 온정주의야말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다. 윤미향 사태 때 지지자들이 정의기억연대를 비판하는 이용수 할머니마저 ‘토착왜구’로 정의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조 국 사태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합리적인 비판도 무분별한 비난으로 둔갑시키는 게 정파적 온정주의다.


 자유주의자(libertarian)들은 온정주의에 반대한다. 온정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속하는 모든 전통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한 자유주의자에 속한다. 그런 윤 대통령도 초반부터 온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실망스럽다.


 윤 대통령의 대표 상품인 공정과 상식의 가치는 온정주의에 묻혀버렸다. 지도자가 온정주의적 성향을 띠면 선한 의도라 할지라도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할 개연성이 크다. 온정주의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는 희생과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도 적다. 나라를 망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돼온 온정주의 문화를 정치에서부터 몰아내야 할 때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