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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치명상 입은 미국 민주주의

 민주주의 모범국인 미국이 반면교사로 전락한 것은 이율배반의 비극이다.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 교과서는커녕 세계적 조롱거리가 됐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와 별개로 수렁에 빠진 민주주의를 건져내는 게 급선무처럼 보인다. 대선 부정 논란으로 3개월째 정국 혼란에 빠진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미국을 비웃을 정도니 말이다.


 뉴욕타임스의 개탄이 뼈저리다. ‘이번 대선에서 미국 정치·사회의 추악한 이면이 낱낱이 폭로됨에 따라 대통령이 누가 되든 대외적 국가이미지가 이미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가치들이 반민주적 세력들에 의해 희생당하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미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올 미국 대선이 드러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며 인종차별의 역사를 치유했던 미국 정치시스템이 불과 몇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 가능성에 대한 우려까지 낳았다.


 투표 전부터 부정선거 음모론을 들고 나온 현직 대통령 트럼프는 기어이 무더기 소송을 제기하고 불복을 선언했다. 바이든 후보측이 표를 도둑질했다는 게 이유다. 근거도 대지 못했다. 야당이 부정 투개표를 했다는 주장은 정치 후진국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억지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충돌했다.

                                                                                 


 미국 대선에서 패자의 승복문화는 1896년 이후 한번도 깨지지 않은 120년 전통이다. 1896년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민주당 후보가 윌리엄 매킨리 공화당 당선인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게 시초였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 후보도 경쟁자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화와 연설로 축하했다.


 트럼프가 부정행위라고 비난한 부재자 우편투표는 1812년 이래 200년 이상 미국 민주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단이었다. 미국의 우편투표는 고향이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파견된 군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도록 마련된 제도다. 어느 쪽의 몰표를 위해 조작할 수 있는 투표 방법이 아니다. 올해 선거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우편투표 선택권이 늘어났을 뿐이다.


 미국의 선거관리는 참담할 정도로 허술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당선이 확정된 2000년 대선 때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그리 개선되지 않았다. 주 정부와 지방정부들이 예산을 핑계로 투표소를 줄여 주민의 선거참여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과 소수 인종의 참정권이 제한된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그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4년간 민주주의를 망가뜨린 죄과는 입에 올리기 어려울 정도다. 인종차별, 성차별, 뻔뻔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 절차 무시, 내로남불, 억지 같은 행태는 한숨이 절로 나오게 했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나라의 추락을 동반한다. 세계 민주주의 수준이 미국 때문에 덩달아 떨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지지 후보나 정당이 다르면 얼굴을 맞대기조차 싫어하는 현상이 유난스러워졌다. 가족 간에도 정파 갈등이 끓어 넘쳤다. 바이든 당선인이 찢어진 미국 사회의 통합과 단결을 다짐하고 호소했지만, 정치적 양극화를 단시간에 치유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인기영합주의에 매몰된 미국 정치의 적대적 정치구조는 앞으로 10년간 혼란 상황을 정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분석까지 나온다.


 취임 초에는 누구든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한 대통령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공화당 못지않게 고루한 민주당 주류 정치인들에게 희망을 걸기 어렵다는 얘기도 들린다. 갈등해소 역할을 해야 할 언론 지형 역시 정파성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졌지만, ‘트럼피즘(Trumpism)의 패배’라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온갖 악재에도 트럼프의 득표가 4년 전보다 700만여 표 늘어난 데다, 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의석수를 외려 늘렸다. 백인 유권자와 농촌 지역에서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안타까워했듯이 미국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쇠퇴와 붕괴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저급 정치 탓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