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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정치에도 금반언(禁反言) 원칙을!

 정치에서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 원칙만 지켜져도 걱정할 일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게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는 법률용어로 ‘금반언(禁反言) 원칙’에 해당한다. 신의성실 원칙의 한 갈래다. 소송에서는 자신이 이미 한 언행을 바꿀 수 없는 금반언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국제법에서도 금반언 원칙은 중요한 요소다.


 말 바꾸기의 달인들이 모인 정치세계에서는 ‘내로남불’이 금반언 원칙을 쓰레기처럼 만들어놨다. 금반언 원칙의 훼손은 여야가 바뀌는 상황에서 특히 심각하다. 어느 쪽이든 야당 때 하는 말과 여당 때 하는 말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의 문제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더라도 지적자가 이미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는 점이다.


 최근 재정 건전성과 직결되는 국가채무비율이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은 대통령의 야당 대표 시절과 정반대되는 발언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19 상황 이전인 지난해 5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채무비율 40%의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정부의 건전재정 원칙을 뒤집었다. 올해 4차 추가경정예산을 기준으로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이미 43.9%다. 다음 정부 때인 2024년엔 이 비율이 58.3%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된다는 느슨한 재정준칙을 기획재정부가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때 국가채무비율 40%를 넘어선 박근혜정부의 2016년 예산안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당시 문 대표는 “국가채무비율이 사상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40% 선을 넘어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이 깨졌다”고 경고했다. 문 대표는 외환위기 속에서 출범한 김대중정부가 흑자로 전환해 노무현정부에 넘겼고, 노무현정부도 흑자재정을 만들어 이명박정부에 넘겼다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정치에서 ‘한 입으로 두말하기’는 특정 개인을 넘어 정당의 공식 입장도 해당한다.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현역병에 매달 2박3일 외박 제공, 예비군 동원훈련수당 5배 인상’을 4.15총선 ‘1호 공약’으로 내세웠다. 2018년 국방부가 병사 복지·병영 문화 개선 방안을 발표하자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대변인은 “대한민국 군대를 수학여행 온 놀이터쯤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논평을 낸 바 있다.


 비리 의혹으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각각 탈당한 국회의원들을 둘러싼 비난 논쟁은 전형적인 내로남불 사례의 하나다. 비슷한 시기에 이상직·김홍업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덕흠 국민의힘 의원이 특권과 공정성 의혹에 휘말리자 소속 정당은 제 식구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당시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비리특권 수호경쟁이 점입가경”이라며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서로를 향한 내로남불 삿대질은 초록은 동색이란 것만 확인해 줄 뿐”이라고 꼬집었다.

                                                                        


 금반언의 원칙은 사회의 공정성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내로남불이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의 잘못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중성이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내로남불이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라는 조사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금반언의 원칙은 위선의 정치를 추방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한 입으로 두말하기’를 법으로 처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정치윤리적 제재를 검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국회의원과 고위당직자, 행정부 고위공직자 등이 금반언의 원칙을 명백하게 어겼을 경우 중립적인 정치윤리위원회의 결정을 거쳐 주의나 경고 같은 윤리적 제재를 가하는 방법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당의 금반언의 원칙 위반 사례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를 유권자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낱낱이 기록하고, 언론이 보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금반언의 원칙을 현저하게 어긴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가 다음 선거에 나설 경우 선거관리위원회의 기록에 담는 것도 검토해봄 직하다. 정치인들의 속성으로 보면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만, 그만큼 중증을 앓고 있는 건 분명하다. 금반언의 원칙을 지켜 내로남불만 줄여도 선진 K-정치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지 않겠는가. 국회 차원에서 금반언 원칙 선언이라도 나오면 좋겠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