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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인권·시민운동 ‘아이콘’이 남긴 숙제

 인권과 시민운동의 상징이 맞은 비극적인 결말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인권과 시민운동을 빼놓고 호명할 수 없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암울하고 참담했던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서 부천경찰서 권인숙 성고문, 박종철 고문치사 같은 야만적 인권 유린 사건의 피해자 변론을 맡아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다. 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 같은 시민단체를 주도적으로 세워 시민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가꾼 것도 박원순의 몫이었다. 낙천·낙선 운동, 소액주주 운동을 비롯한 혁신적 프로그램은 시민운동의 차원을 높이고 영역을 넓혔다. 3차례 연임한 서울시장으로서도 균형발전 도시재생 복지 등 실질적인 생활 행정으로 승화시켰다.


 무엇보다 그는 평생토록 여성 인권 옹호자로 기억돼왔다. 1993년 한국 1호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모 교수의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아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행위임을 각인시킨 한국 최초의 직장 내부 성희롱 소송으로 유명하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은 저명한 페미니스트 법률가 캐서린 매키넌 미시간대 로스쿨 교수가 1979년 만든 새로운 개념이다. 박 변호사는 이후에도 여러 성폭력 사건을 맡아 피해자를 도왔다.


 서울시장 재임 때도 모든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추진했다. 스스로 “감히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방정부 가운데 최초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모든 예산에 성인지적 시각을 반영하고, 성평등 관련 조례를 제정했다. 2019년 1월에는 성평등 문제를 보좌하는 ‘젠더특보’를 시장실 직속으로 신설하기도 했다.

                                                                          

   
 놀라운 반전에는 이처럼 여성 인권을 역설하고 실천해온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될 수 있다는 중압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추측에 불과할 뿐이지만, 삶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추행 고소 사건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의 발자취가 부정적 이미지로만 덧칠되는 것은 안타깝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이은 지방정부 수장의 의혹이어서 부가적인 파장과 정치적 논란을 낳는다. 올곧게 살아왔다고 여긴 박 시장마저 성적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남성 고위공직자의 ‘성인지 감수성’이 또다시 숙제를 남겼다.


 전직 비서였던 여성이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고소한 일로 말미암아 흔히 일컫는 ‘권력형 위력’에 초점이 모인다. 절대적 인사권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의 위상과 잇단 성추행 사건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꾸준히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음에도 지자체장들의 잇따른 일탈이 막강한 권력에서 비롯된다는 진단은 정치권 모두가 새겨들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잇달아 연루되는 현상에 대한 성찰은 필수불가결하다.

                                                                      


 한국의 50~60대 남성들, 특히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사회적 빨간불을 심각하게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부쩍 유행어처럼 등장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를 귀담아듣지 않거나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권한이 막강한 모든 선출직 공직자에게 ‘성인지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성평등과 인권교육’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봄직하다. 이미 대학에서는 몇년 전부터 누구든 ‘성평등과 인권교육’을 해마다 반드시 이수하고 정해진 시험 점수를 받아야 한다. 성평등 인권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기성세대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현실까지 생생하게 감전된다.


 시대변화는 개인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에만 맡겨 놓을 단계를 넘어섰다. 정부나 정당에서 부적절한 성적 언행을 눈감아주는 행태도 중지돼야 한다. 상징적인 인물이 추문에 휘말리면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피해가 확산하는 현상도 본질을 흐리는 요인의 하나다.

 

  일부에서 “여성 비서를 고용하지 말자”면서 ‘펜스룰’(Pence Rule)을 들먹이는 것도 편견을 부추긴다. ‘펜스룰’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하원의원 시절 “아내를 제외한 여성과 단둘이 식사를 하지 않고, 아내 없이는 술자리에 가지 않는다”고 천명한 데서 유래했다. 성인지 감수성 결여의 피해자는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됐다.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성과 무작정 거리를 두려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