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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권력 오류 바로잡는 다중의 힘

입력 : 2008-06-13 17:28:48수정 : 2008-06-13 17:28:52

들불처럼 타오른 촛불집회를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 운동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집회와 시위에서 지도부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미국 쇠고기 재협상 촉구 촛불집회에 참여한 네티즌과 몇몇 운동 조직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일부 조직이 보여준 행태가 더 나은 방향으로 뜻을 모으는 단순한 ‘합의’ 과정인지, 다중의 자발성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는 ‘지도’인지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광장에서 계속 촛불을 들 것이냐, 아니면 거리로 나갈 것이냐’하는 논쟁에서부터 이슈를 쇠고기 문제로 한정할 것인가, 확대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토론은 끊일 줄 몰랐다. 시민들의 자발적 시위가 더 큰 효과를 거두려면 규모가 확대돼야 할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를 압박할 강력한 힘이 있는 노동자들의 조직 파업 투쟁 등이 필요하다는 게 일부 운동조직 측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맞서 다중의 활력과 정서를 또다시 ‘지도’와 ‘관리’ 속으로 끌고 들어가 힘을 빼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만만찮았다. 이번 촛불집회를 한국 시민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자율성의 승리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여기서 ‘자율주의’란 세계적인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창한 ‘아우토노미아’를 의미한다. ‘아우토노미아’는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비의회 좌파 운동의 거대한 흐름이자 이론적 대안이다. 자율주의는 정당과 노조로부터 사회운동의 독립성 확보, 전통적인 지도-피지도 관계에 대한 거부 등을 요체로 한다. 촛불집회는 대의민주주의에만 맡겨둘 수 없어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확대하려는 다중적 의지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해도 좋겠다.

4년 전쯤 출간된 파올로 비르노의 ‘다중’(갈무리)과 올 초에 나온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공저 ‘다중’(세종서적)은 촛불집회를 되새겨볼 수 있는 참고서로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비르노와 네그리는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오랜 실천 동지이자 옥중 동지여서 같은 제목의 두 책을 비교하며 읽으면 의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사제 관계다.

지은이들에게 다중은 민중이나 대중과 달리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새로운 주체다. 다중은 민중처럼 동일성이 아니며, 대중처럼 획일성도 아닌 개념이다. 다중의 내부적 차이는 서로 소통하고 함께 활동하게 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들이 다중 개념과 가장 직접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민중 개념이다. 민중은 하나지만 다중은 다수다. 다중은 대중과도 다르다. 대중은 동일성이나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중과 같지만, 차이를 만들거나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다중과 구별된다. 다중의 특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모델이 촛불집회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인터넷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은 앞서 나온 그들의 유명한 공저 ‘제국’의 속편 성격을 띠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를 신도, 국가도, 시민사회도 아닌 삶의 차원에서 재구축하는 ‘삶정치학적’ 혁신이다.

비르노의 ‘다중’은 자율주의의 주체로 설정되는 다중의 존재론적 특성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책이다. 비르노는 이 책에서 다중 개념을 포스트포드주의 문맥에서 새롭게 정의한다.

거대집단 ‘제국’에 맞설 힘은 다중뿐이라고 한 네그리의 외침은 촛불집회에서 거대 권력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다중뿐이라는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자율주의가 국가 권력의 폭력적 탄압에 무기력하고, 모든 운동이 자동적으로 네트워크되지 않는다는 약점 때문에 부정적이거나 비판적인 품평을 내놓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규모로 자율주의를 실천하는 일이 험난한 것도 사실이다. 책도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계의 지적 흐름을 느껴 보려면 읽어봄직한 책이다. 한국에서 이들의 사상을 가장 많이, 제대로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조정환, 윤수종 정도는 알아 놓으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