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5-30 18:00:01수정 : 2008-05-30 18:00:06

“욕망을 버리지 못한 인간은 덫에 걸린 토끼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닌다. 그러므로 중생이 스스로 무욕의 경지를 추구함으로써 욕망을 떨치게 하라.”(부처) “인간 본연의 한계를 깨닫고 물질적 욕망을 채우려는 욕심을 버릴 때, 우리는 가치 있고 조화로운 삶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와 20세기의 천재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말이 너무나 닮아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경이로워했다. 닐스 보어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같은 양자물리학의 거목들이 물리학의 인과율에 이르러 연구를 포기해야 하는 허탈감에 빠져 한마디씩 남긴 말도 색즉공(色卽空) 사상과 공교롭게 일치한다. ‘품격을 지닌 무소속 학자’란 별명을 지닌 미국 물리학자 토머스 맥팔레인이 쓴 ‘아인슈타인과 부처’라는 책의 부제는 그래서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만남’이다.

대립적인 시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서양 첨단과학과 동양 종교의 만남은 맥팔레인에 훨씬 앞서 프리초프 카프라라는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물리학자가 선견했다. 카프라의 대표저작 가운데 하나인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에서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대변되는 최첨단 물리학과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동양의 철학과 종교 사상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게 책의 핵심 메시지다.

카프라는 양자물리학의 이론과 동양사상의 관련성을 들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 모든 사물은 연결돼 있으며 주변 환경과 세계가 인류와 밀접한 관련성으로 통합되어 있음도 입증한다.

이 책은 특히 객관주의와 가치중립성의 신화로 무장한 현대 과학의 오만과 한계를 비판하는 의미가 깊다. 1960년대에 싹튼 ‘신과학 운동’은 75년 이 책의 출간과 더불어 본격화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최근 쏟아져 나오는 ‘과학과 동양사상’ 관련 저작들이 거의 카프라를 대부로 삼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권위를 입증하고 남는다. 오래된 책이라 현대 이론물리학의 총아인 ‘초끈이론’이 빠져있는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것 때문에 평가가 낮아질 수는 없다. 모든 선구적 생각이 그렇듯이 그의 주장은 이단으로까지 비쳐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12곳의 출판사를 전전해야 했던 일화는 눈물겹다.

카프라는 다른 저서 ‘탁월한 지혜’에서 이 ‘고난의 시기이자 순례자의 시기’에 선불교와 도교에 관한 책을 접하면서 현대물리학의 모델과 이미지들이 동양사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 매료되었다고 털어놨다. 신과학을 부정하는 주류 과학계의 반격도 여전히 거세지만 카프라의 영향을 꺾는 것은 쉽지 않는 숙제다.

카프라가 이 책을 쓴 지 30년이 넘었다. 그러고 보면 2세기에 쓰인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의 그물망’이 오늘날의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언하는 것 같기도 해 놀랍다. “인드라의 하늘나라에는 진주 구슬로 짜인 그물망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극히 정교하게 짜여 있어서 그중의 한 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모든 구슬들이 비쳐 보인다. 그 한 부분을 건드리면 그물망의 모든 부분, 곧 실재의 모든 부분으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낸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단지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 사물과 한데 엮여 있다.”

종교와 과학의 통섭을 운위하기는 어렵겠지만 카프라의 탁견은 끝간 데를 모르는 듯하다. 미국 언론인이자 평화운동가인 노먼 커즌스가 카프라의 ‘탁월한 지혜’를 일러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 놓은 현대 사상의 잔칫상”이라고 평한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설가 한승원이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 ‘흑산도 하늘길’을 내면서 흔치 않게 참고도서를 덧붙였는데, 그 가운데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포함돼 있는 것도 흥미롭다. 29년 전인 79년 번역본 초판이 나온 직후 이 책을 단숨에 읽은 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던 추억이 생생하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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