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외교 협상에서도 사업가의 주특기를 영리하게 써 먹는다. 그 가운데 ‘정박효과(anchoring effect)’는 값을 흥정할 때 무시로 등장한다.


 부동산 재벌이기도 한 트럼프는 돈 많이 버는 비결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건축 의뢰를 받으면 언제나 가격에 5000만 달러나 6000만 달러 정도를 더 붙입니다. 고객이 7500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면, 나는 1억2500만 달러 정도 들 것이라고 하곤 실제로는 1억 달러에 짓습니다. 치사한 짓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박효과’는 닻을 내린 배가 많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맨 처음 제시된 숫자가 기준점 역할을 해 이후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현상을 일컫는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있었던 실험은 정박효과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학생 40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똑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임무를 줬다. 조건은 같았다. 첫 제안을 어떻게 하느냐는 게 유일하게 다르다. A 그룹에겐 ‘첫 제안을 700달러 이상으로 하라’고 주문했다. B 그룹에게는 ‘700달러 이하로 첫 제안을 하라’고 했다. 그 결과, A 그룹 학생들은 평균 625달러에 물건을 팔았다. B 그룹 학생들의 평균 판매 가격은 425달러에 불과했다. 첫 제안이 달랐을 뿐인데 200달러의 차이가 났다.

                                                  

                      
 이렇듯 사람들은 처음 제시된 숫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녔다. 이는 심리학자로서는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과 동료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가 공동 실험을 통해 증명한 효과다.


 트럼프는 다른 나라와의 주요 협상에서 정박효과를 동원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계약파기 의중을 내비친 뒤 선심 쓰듯 양보하는 패턴이 이어진다. 트럼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 때 한국 측을 정박효과로 윽박질렀음이 드러났다. 트럼프는 미국이 적자를 너무 많이 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한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넘어 파기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백악관 참모들에게 협상을 깨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최종 협상 결과, 미국의 최대 관심사였던 자동차 분야에서 일정 부분 권리를 한국이 양보하는 선에서 타결됐다. 미국이 한국에 무기를 대량으로 판매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간 뒤였다.


 트럼프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앞두고서도 주한미군 철수론을 흘리며 위협했다. 한국은 최종적으로 미국이 마지노선으로 제시했던 1조1300억 원(10억 달러)보다 약간 낮은 수준인 1조300억 원을 ‘유효기간 1년’과 함께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 멕시코에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철회를 위협하면서 자동차 부품 등의 원산지 기준을 강화하는 협정을 이끌어냈다. 트럼프 정부는 무역 부문에서 이를 대표적인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을 정도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무역협상에서도 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을 비롯한 전통적인 동맹국들에게도 미군 주둔비용 인상을 압박했다.


 트럼프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서도 정박효과를 기대하는 듯하다. 최근 로이터통신의 보도 내용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완전 항복에 가까운 요구사항 문서를 제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핵 시설과 생화학 무기, 탄도미사일 등과 관련 시설의 완전한 해체,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 미국 반출, 핵 프로그램에 대한 포괄적 신고, 미국과 국제 사찰단에 완전한 접근 허용, 관련 활동과 새 시설물 건축 중지, 모든 핵 프로그램 과학자·기술자들의 상업적 활동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트럼프는 어느 수준이면 타협할지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을 게다.


 트럼프와 같은 전략을 먼저 구사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힘의 우위라는 조건이 맞을 때 가능하다. 값을 무조건 세게 부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만큼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당한 논거가 필요하다. 워싱턴을 방문해 오는 11일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비핵화 조율에 나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최저 양보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북한과의 중재에 나서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