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대한민국은 ‘네이밍법’ 나라 같다. 정식 이름이 따로 있지만, 홍보 효과나 주목도가 높다는 이유로 특정인의 이름을 딴 네이밍법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무고하고 억울한 누군가의 죽음이 선행돼야 법이 생기는 나라처럼 됐다. ‘김용균법’, ‘윤창호법’, ‘임세원법(안)’이 그렇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태완이법’ ‘최진실법’ ‘신해철법’ ‘유병언법’ 같은 특정인 사후 네이밍법을 여럿 가졌다.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딴 법은 대개 세 부류로 나뉜다. 발의한 사람의 이름을 붙인 법, 가해자의 이름을 붙인 법, 피해자의 이름을 붙인 법이다. 줄 잇는 특정인 사후 입법은 달라진 사회 인식이 반영된 것이긴 하지만, 위험 사회에 무심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한 ‘김용균법’은 김 씨의 죽음이 일으킨 사회적 공분 때문에 가능했다.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는 이 법안은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 소속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24) 씨가 운송설비 점검을 하다가 사고로 숨지는 비극 이후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사후에 드러난 열약한 작업 환경은 동정심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여론의 힘이 집결된 것은 비극적인 이름이 언론을 통해 확산하고 어머니 김미숙 씨가 자식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발 벗고 나선 덕분이었다.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은 이 사건을 외면했다. 보수 언론은 초기 한동안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고, 보수 야당도 관심 밖에 두었다. 이에 앞선 서울 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김 모(19) 군 사망사고 때 이미 대책이 마련됐어야 했으나, 보수 정치인들이 특히 소극적이었다.

                                                                                  


 음주 운전으로 인명 피해를 낸 운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윤창호법’은 만취 운전자가 몰던 차에 치여 숨진 군 장병의 목숨을 제물로 삼았다. ‘윤창호법’은 윤 씨의 친구들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이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청원 사흘 만에 공감자 수가 20만 명을 넘어섰고, 친구들은 ‘윤창호법’을 발의하기 위해 국회를 분주히 드나들어야 했다.

 서울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임세원 씨의 죽음 이후로도 관련법 제정이 적극 추진되고 있다. ‘임세원법안’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의사와 같은 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다. 보건복지부는 투철한 의료 정신을 지닌 의사의 사후에야 진료 현장의 안전실태 파악에 나섰다.


 장기미제 살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는 ‘태완이법’도 6살이던 김태완 군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1999년 5월 6살이던 김 군은 대구시 동구 효목동 골목길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범인이 던진 황산에 맞아 숨졌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2015년 살인죄의 공소 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태완이법’이 오랜 산고 끝에야 확정됐다.


 ‘신해철법’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가수 신해철의 의료사고 결과물이었다. 의료 사고로 숨지거나 한 달 이상 의식불명 상태에 놓인 환자나 보호자가 의료분쟁 조정을 신청하면 병원의 동의가 없어도 조정 절차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최진실법’은 부모가 이혼한 상태에서 한쪽이 사망하면 다른 한쪽에게 자동으로 친권이 넘어가던 제도를 폐지했다. 이 법안이 발의된 계기는 2008년 배우 최진실이 사망하면서 자녀의 친권이 전 남편인 조성민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성민은 이미 친권 포기 상태였다.


 ‘유병언법’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범죄수익을 은닉한 제삼자에게 숨겨놓은 재산도 추징할 수 있게 했다. ‘유병언법’이 없었다면 세월호 사고 수습 비용 6000억 원 중 5000억 원을 국민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 결국 재산 추징에 실패했지만, 제도는 마련된 셈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한국 사람은 억울하게 죽어서 법을 남긴다’는 냉소적인 패러디가 폐부를 찌른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그것도 곡절과 진통 끝에 가까스로 대책을 마련하는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누구나 안전하게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게 정부와 정치인의 책무다. 무고한 죽음을 사전에 완벽하게 예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차례 경고등이 켜졌음에도 방치한 직무유기는 비난으로만 넘어갈 수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