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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희망고문의 정치

 유대인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한 혐의로 종교재판소 감옥에 갇힌다. 절망에 빠져 힘겹게 버티던 랍비는 어느 날 저녁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한다. 다시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잔뜩 부푼다. 온몸에 생기가 돌고 삶의 의욕으로 충만했다. 그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밤새 도망쳐서 산속에 숨어들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끽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종교재판소 소장이었다.

 

  랍비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19세기 프랑스 작가 비예르 드 릴라당의 단편소설 ‘희망고문’은 형용모순적인 신조어를 지구촌에 퍼뜨렸다. 이렇듯 ‘희망고문’은 절망적인 결과만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작은 희망으로 말미암아 더 고통스럽게 되는 형편을 일컫는다.


 새해만 되면 정치인들은 ‘희망고문’이란 공수표를 발행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라는 단어를 35번, ‘성장’이란 낱말을 29번이나 동원하면서 경제살리기에 대한 희망을 부풀렸다. 문 대통령이 국민에게 가장 큰 희망고문을 안긴 것은 일자리다. 그가 취임 이후 가장 먼저 한 게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만든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난해 취업자 증가폭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기록을 냈다. 실업률도 17년 만에 최고치였다. 심각한 취업난에 젊은이들이 직장 구하기를 아예 포기하고 있다. 절반 이상의 청년들이 취업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구직활동을 중단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전원 정규직화도 대표적인 ‘희망고문’ 영역의 하나로 남아 있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현장 방문지로 인천국제공항공사를 찾아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천명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전환비율은 여전히 낮은 상태다. 처우 개선은 진전이 없거나 오히려 후퇴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다. 비정규직 제로라는 ‘도그마’에 빠져 목표 달성에만 치우친 결과다. 취업과 정규직이라는 지나친 희망은 20대에게 외려 고문으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정기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때 “소득주도 성장 등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고 장밋빛 희망의 등불을 건넸다. 그러자 1인당 GDP 4만 달러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희망고문일 뿐이라는 냉정한 논평이 나왔다. 심지어 정부가 의욕적으로 내세운 빅데이터, 블록체인, 공유경제, 인공지능(AI), 수소경제 같은 혁신성장 분야도 개혁 장애물에 걸려 숫자만 나열한 ‘희망고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선거 때 공약은 대부분 ‘희망고문’ 형태로 똬리를 틀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모든 후보가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공약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5년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으로 가장 이상적인 이 제도를 제안했다. 정치개혁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던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좌초위기에 빠졌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이제 와서 이런저런 핑계를 들이대며 논점을 흐리고 있어서다. 두 거대정당의 변심은 ‘더불어한국당’이라는 냉소적인 조어를 낳았다. 문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정치개혁은 고사하고 검찰개혁, 재벌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 같은 게 하나라도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이뤄진 게 사실상 없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맹성해야 할 부분이다.

 개성공단 기업인들도 지난 주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신뢰로 지난 3년 간 희망고문을 견뎌왔는데 더는 버티기 힘들다”며 “개성공단 점검을 위한 방북을 승인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북한과 미국의 손에게 달린 문제이지만, 이들도 희망고문을 호소한다. 국민들에게 “기다려달라”는 말은 ‘희망고문’의 다른 표현이다.

 

  희망이 아예 없다면 모든 기대를 접고 깔끔히 손을 뗄 수 있다. 약자에게 ‘희망고문’은 가장 이기적이고 비겁한 갑질이 될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 니체도 모든 악 중에서 희망을 가장 나쁜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말로 먹고 산다는 게 정치인이라지만 희망을 고문으로 만드는 일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