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지도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성이다. 이는 동서와 고금을 뛰어넘는 훈언(訓言)이다. ‘타키투스 함정(Tacitus Trap)’은 신뢰 상실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은 학술용어로 쓰인다. ‘한번 신뢰를 잃은 정부는 무슨 일을 해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경구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자 역사학자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명저 ‘타키투스의 역사’에서 “황제가 한번 사람들의 원한의 대상이 되면 그가 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두 시민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훗날 학자들은 이를 사회현상의 하나로 호명했다.
그 옛날 공자도 군사, 식량, 신뢰 중에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제자 자공이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고 묻자 군사가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식량이라고 했다. 공자는 신뢰가 없이는 서 있을 수조차 없다고 가르쳤다.
문재인 대통령도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것”이라고 참모들에게 잠언을 남겼다. 문 대통령은 지난 8월20일 열린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결과를 공유하며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때 “고용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마음이 매우 무겁다”며 자성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말과 실행이 일치한다는 믿음은 지금까지 흔쾌히 주지 못하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국정현안인 경제정책에서 실정을 거듭하자 사령탑을 바꾸었지만, 국민은 확신을 유보하는 것 같다. 외려 실망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번 인사는 많은 이들이 실패로 규정하는 정책을 바꾸지 않겠다는 함의를 분명히 담았다. 김수현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는 패키지라면서 경제정책을 바꾸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며칠 전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2.5%에 그치고 내년 성장률은 더 나빠져 2.3%로 낮아질 것이라는 국제신용평가사의 실망스러운 전망이 나왔다. 그럼에도 한 정책당국자는 경제 성장률이 나쁘지 않다고 주장해 국민의 열화를 돋웠다.
직전 사회수석비서관이었던 김 실장은 서울 강남 집값 폭등, 입시정책 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같은 직책을 맡았던 인사가 공개 비토에 나섰을 정도다. 어제(11일) 드러난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 들어 10월까지 서울의 집값 상승률이 10년 만에 가장 높았던 반면, 지방은 14년 만에 처음으로 하락했다. 급등하는 집값을 잡기 위해 ‘8·2 부동산 대책’ ‘9·13 부동산 대책’ 같은 강도 높은 투기 억제 처방을 내놓았으나 오를대로 오른 부동산 가격이 다시 내려가긴 어렵다. 청년층과 서민층이 절망감을 떨쳐버리기엔 늦었다.
‘맑은 하늘을 돌려주겠다’던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온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데도 말이다. 미세먼지가 나쁜 날이 예보되면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알리미에만 의존하고 있는 게 벌써 1년 6개월을 넘었다. 국민은 마스크가 아니라 방독면을 써야 할 지경이라고 아우성이다. 미세먼지가 극에 달해 불만이 고조될 때마다 땜질대책을 내놓는 게 고작이다. 엇박자 에너지정책과 맞물려 효과도 의심스럽다.
청문회 무용론이 나오는 문 대통령의 인사스타일도 과거 정부보다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비판이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인사청문회 원조국가인 미국에서라면 청문회 대상으로 올릴 수조차 없는 인사검증이 넘쳐난다. 국회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했어도 임명한 고위공직자가 조명래 환경부장관의 임명강행으로 현 정부 들어 열 명으로 늘어났다. 출범한지 1년 6개월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박근혜 정부 전체(9명)보다 많다. 노무현 정부 때는 3명에 불과했다.
대통령의 지지도를 배경삼아 강행하는 오만한 인사가 국민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요인의 하나다. 병역 기피,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논문 표절 등 5대 비리 관련자를 고위 공직에서 배제하겠다고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1월 기준을 완화한 ‘7대 원칙’을 새로 내놓았지만, 그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문정인 대통령 특보는 “박근혜 정부가 타키투스의 함정에 빠졌다”고 일갈한 바 있다. 촛불혁명에 힘입어 탄생한 정부가 과거 정부보다 그리 나은 게 없다면 국민이 신뢰를 거둬들일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16대 미국 대통령은 “민심을 얻으면 못할 게 없고, 민심을 잃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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