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의 가장 큰 폐해는 평등권 침해다. 근대 인권개념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덕목인 평등을 해치는 것은 치명적인 악덕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의 하나이자 적폐청산 모토가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 논란의 대상은 주로 권력 세습, 재력 세습 같은 전통적인 것이었으나 최근 종교 지도자 세습, 연예인 세습, 일자리 세습 같은 새로운 개념이 부쩍 표적으로 떠올랐다. 세습은 좁게 보면 한 집안의 신분이나 재산,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주는 행위를 뜻한다. 요즘에는 신분·재산·직업·기예·생활양식·각종 규범 등이 혈연·지연·학연에 따라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대물림 행위로 넓게 해석된다.
서울 지하철 1~8호선 운영회사인 서울교통공사의 ‘고용 세습’ 의혹은 적폐 청산을 첫 번째 과업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의 역설적인 본보기가 될 개연성이 높다. 감사원 감사 결과를 본 뒤 고칠 것은 고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른 시간에 진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일자리가 최대 화두인 시대의 고용 세습 논란은 ‘고용 정의’를 무너뜨리는 중대사안이어서다.
서울교통공사 신규 정규직 전환자 중 약 10%인 108명이 임직원의 친인척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혹을 사기에 부족하지 않다.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이들 친인척은 직원 자녀 31명, 형제·남매 22명, 삼촌 15명, 배우자 12명 등의 순이다. 정규직 전환자 가운데 당시 인사처장의 아내가 포함되고 전임 노조위원장의 아들 특혜 채용 의혹이 이는 등 공분을 자아낼 정도로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자체 공개한 정규직 전환 친인척 명단에서 고위간부 부인 이름이 누락돼 의혹을 더욱 부추긴다.
정규직 전환이 예고된 상황에서 채용 문턱이 낮은 비정규직으로 쉽사리 입사했다면 명백한 반칙이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무기 계약직으로 입사하면 곧 정규직으로 전환되니 친인척의 무기 계약직 입사를 독려해야 한다’는 풍문까지 돌았다니 의혹을 살 수밖에 없는 정황인 듯하다. 서울교통공사는 평균 연봉이 6700만원에 이를 만큼 선망의 대상이다. 노른자위 공기업에서 고용세습 논란이 벌어지면 취업준비생들의 박탈감은 엄청나다.
전·현 직원 친인척을 취업에서 우대하는 고용 세습 의혹은 서울교통공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난다. 이미 인천공항공사 협력업체 6곳에서 14건의 친인척 채용 의혹이 불거지고, 한국국토정보공사 정규직 직원 직계가족의 정규직 전환 사례 19건 등의 의혹이 잇따르고 있어 심각성을 더해준다. 한 협력업체 임원의 조카 4명이 동시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하는 일이 벌어졌다니 입이 벌어진다. 이래서 공기업 전반에 대한 전수 조사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야당이 제기한 의혹이라고 정치공세로만 치부해서는 논란을 해소하기 어려운 사안인 것 같다.
사실, 일부 민간 대기업도 장기근속자 직계 자녀 우선 채용 같은 형태로 노동법 위반 소지가 있는 노사협약을 지녔다. 아직 단체협약에 고용 세습 조항이 있는 기업이 29곳이라고 한다. 기존 직원의 직계 자녀 등에게 입사시험 가산점을 주거나 특별·우선 채용하는 고용 세습은 취업 기회의 공정성을 해쳐 고용정책기본법과 직업안정법을 위반하는 불법 행위다. 노조들이 부의 세습은 안 된다고 외치면서 고용 세습은 단체협약까지 명시를 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이 같은 비상식적 채용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명분을 훼손한다.
고용 안정성 확대를 위한 정규직화 정책과 고용 비리는 엄정하게 구별해야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쉽게 들어가 정부가 열어준 문으로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납득하기 어렵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절차와 제도에 결함이 있는지도 파악해서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과거 정부 때 공기업·금융기관 적폐 사례에서 나타났듯이 채용 비리는 청년 구직자들에게 분노와 좌절감을 안겨주는 범죄행위다. 과거 정권 때의 불법·편법 채용을 전수 조사했듯이 친인척 반칙 채용 문제도 의혹을 없애고, 병폐가 크게 개선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촛불혁명으로 능력주의 사회를 구현한다면서 적폐청산에서 내편은 되고 다른 편은 안 되는 선례를 남기면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된다. 고용도 세습되는 시대의 그늘에 햇빛을 비춰야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가능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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