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문득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얼마 전 “나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을 때다. 트럼프는 “나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썼다. 훌륭한 편지였다”고 털어놨다.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와 적대적인 두 나라 지도자의 협상을 단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캐릭터나 메시지의 상징성에서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의 발상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준세이는 열정, 여자 주인공 아오이는 냉정을 표상한다.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를 구축하려는 북한과 미국도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며 ‘밀당’을 주고받는 상황이다. 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은 스스로 밝혔듯이 상대방의 진심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종전선언의 분수령인 2차 북미정상회담을 위한 징검다리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비핵화를 가급적 빨리 마무리 짓고 정상국가로 나가려는 북한의 열정과, 조기 비핵화를 원하지만 철저한 검증을 거치겠다는 미국의 냉정이 대치하는 기류였다. 폼페이오 장관 방북 결과, 북미정상회담을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열기로 의견을 모은 것을 보면 장애물 경기의 두 번째 허들을 넘어서는 단계에 다다랐다고 봐도 무난할 것 같다.
폼페이오의 4차 방북 성공 가늠자는 북미정상회담 시기와 장소 결정 여부였다. 양측이 2차 정상회담의 구체적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한 협의를 계속 진행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어느 정도 의견조율이 이뤄진 상태인 듯하다. 국빈급 외빈용인 백화원 초대소 오찬장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두 나라에게 좋은 미래를 약속하는 좋은 날이었다”며 만족감을 드러냈고, 폼페이오 장관도 “위대한 방문”, “매우 성공적인 아침”이라는 표현까지 동원한 걸 보면 짐작이 간다.
양측의 희망사항이 협상테이블에서 큰 그림으로 그려졌을 높은 확률도 읽혀진다. 북한이 취할 비핵화 조치들과 미국 정부의 참관 문제 등에 대해 협의가 있었으며 미국이 취할 상응조치에 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는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의 전언에서 윤곽이 드러난다. 비핵화 조치와 종전선언을 놓고 넉 달간 힘겨루기를 하던 양측의 의미 있는 진전임에 틀림없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의 1단계 조치로 영변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 등을 폐쇄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 방북을 수용했을 가능성을 먼저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겠다고 약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전문가들의 참관 아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해체를 하는 방안 등이 플러스 알파로 포함됐다면 금상첨화다.
북미 협상의 단계마다 그랬지만, 앞으로도 최우선과제는 불신을 떨쳐버리는 일이다. 워싱턴과 평양에는 상호불신이라는 끈질긴 유령이 상존한다. 특히, 미국 조야에서는 트럼프의 김정은 호감에 딴죽을 거는 주류세력이 늘 만만찮다. 반트럼프 대표주자인 낸시 펠로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의 취향에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고 꼬집는다. MSNBC방송은 “그것은 짝사랑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정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호의가 정점에 도달했다”며 과유불급을 경계한다.
이 때문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시간게임(time game)’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폼페이오 장관도 마찬가지다. 중간선거에 연연하지 않아 11월6일 이전에 북미정상회담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협상도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준세이와 아오이는 늘 타이밍이 맞지 않아 사서 고생한다.
열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열정(passion)의 어원이 고통(pain)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사랑이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듯이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도 마찬가지다. 실패한 과거의 패러다임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입구로 하고, 평화협정을 거쳐 북미 국교정상화를 종착지로 삼는 체제보장 시나리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올해 안에 북미정상회담→남북미 종전선언→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구상이 탄력을 받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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